우리 나라 사회보장제도의 초석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던 기초생활보장이 수급권자 선정을 제약하고, 생계비 급여액을 줄이려는 정부의 각종 조치와 예산 부족으로 거대한 사기극이 되어 버릴 위험에 직면해 있다. 사회단체들이 총력을 다해 이를 막아 보려 노력하고 있지만, 결과를 낙관하기는 어렵다. 생각해 보면 이것 뿐 아니라, 지난 수년간 추진해온 사회보장제도가 다 비슷한 처지에 있다.

12년의 끈질긴 노력 끝에 통합된 의료보험이 건강보험으로 새출발한다. 그러나, 급여범위를 확충하고 건강증진, 예방, 재활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건강보장" 체계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재정상태의 악화로 난관에 처해 있다. 급여확대는커녕 지역의보만도 금년에 약 7천억원 정도 적자가 예상되는 실정이다. 건강연대는 총선 전에 지역의보 국고지원 50%의 약속을 여당으로부터 얻어내었으나, 총선이 끝나자 다시 예산 타령이 시작되고 있다. 의료보호는 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으로 새로운 탈바꿈을 해야 할 상황이나, 이 역시 예산 부족을 이유로 개악되기 직전에 있다. 국민연금은 정부의 정책적 실수와 보수언론의 공격으로 극심한 파동을 겪은 후에 겨우 안정단계에 들어갔으나, 제도의 틀에 들어오지 않는 기피 인구가 늘어나 보편주의 원칙으로부터 대폭 후퇴하였다. 고용보험, 산재보험, 장애인 직업재활 등이 역시 갖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회보장은 국민들을 각종 위험에서 보호하고, 안정된 삶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필수적인 사회제도이자, 우리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할 제도이다. 그러나, 지난 2년간의 경험에서 곳곳에 저항 세력이 존재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정부내 관료들의 반대와 무능력으로 제도의 틀은 왜곡되고, 보수언론은 사회보장체계가 국민 부담을 증가시키는 것인 양 악선전하고 있다. 이익집단의 반발은 번번이 사회를 무정부 상태로까지 끌고 갔다. 무엇보다도 사회보장 재원의 극심한 부족으로 제도가 말라죽어 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뚫고 나갈 것인가? 사회보장 제도의 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이제 생각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

첫째, 의보, 연금, 기초생활보장 등 개별적인 프로그램 단위의 노력이 아니라 사회보장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 사회보장의 각 제도들은 극우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바다 위에 상호연관성이 없는 개별 프로그램으로 외로운 섬들과 같이 떠 있다. 각각의 제도가 약간만의 확충을 시도해도 보수적 정책입안가로부터, 심지어는 국민대중으로부터도 협공을 받게 된다. 이 상황에서 이왕에 어렵게 얻어낸 성과조차 제대로 보존할 수 있을지 전망하기 쉽지 않다. 사회보장제도가 국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일련의 필수적인 제도이며 이것이 대안이라는 "공동체"적 인식을 전국민이 공유하는 새로운 담론으로 만들어 내지 못하는 한 -즉, 섬과 섬 사이의 바다를 메워 거대한 육지로 만들어 놓지 않는 한- 이러한 상태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사회보장의 재원을 "파격적으로" 늘리는 노력이 필수적인 단계에 와 있다. 기초생활보장과 건강보험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난 수년간의 제도 도입 싸움의 성과를 지켜내고 다음 단계로 나가는 길목에서의 관건이 바로 "재정"라는 것이 이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이미 도입된 사회보장제도의 운영을 위해서만도 족히 수조원대의 추가재원이 소요될 것이고, 새로운 제도(예를 들어, 노인, 장애인 등을 위한 보건복지, 육아수당, 건강보험의 상병수당 등)를 추가하려면, 그 규모는 더 커질 것이다. 이런 규모라면 "보건복지 예산확보"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묻고, 국가재정 운영의 원칙을 바꿔 놓는 거대전략으로 나가야 한다. 파탄된 몇몇 기업을 살리기 위해 수십조원대의 공공재원이 쉽게도 투입되고, 국방장비 도입과 고속철도 건설 등 공공프로젝트의 수행에서 수백, 수천억원 대의 재정이 간단히 누수되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과연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 경제와 국방뿐인가? 사회보장, 환경, 교육 등에 부여되는 우선순위를 획기적으로 높여 국가재정이 쓰여지는 용도를 "밑바닥에서부터" 바꿔 놓아야 한다.

셋째, 경제정의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던 소득, 재산의 파악, 조세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져 국가 재정 수입을 늘려야 한다. 최근 '60년대부터 90년대 말까지 지하경제 규모는 GDP의 평균 20%를 차지해 세계 8위'라는 보고가 있었다. '98년에는 급격히 늘어 26%인 116조원을 기록'했는데 '이는 IMF 때문'이라고 이 보고서가 해석했다지만, 그 해에 금융실명제가 중단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흔히 "자영자 소득 파악"이 문제라고 하지만, 어디 자영자뿐인가? 재벌, 기업인, 전문경영인, 고위공직자들의 소득과 재산도 정확히 파악되어야 한다. 소득파악,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조세개혁 등은 이제 사회보장 운동과 튼튼한 끈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경제정의"와 "복지국가"로의 운동과제는 둘이 아니라 동전의 앞뒤와 같은 "하나"인 것이다. 검은 돈이 차단되면 그렇게 어렵다는 "정치개혁"도 시간 문제일 뿐이다.

21세기의 한국사회를 사람이 살만한 사회로 다시 만들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이것이 이제 모든 사회운동이 단결해서 추진해야 할 공동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김용익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 서울의대 교수
2000/06/10 00:00 2000/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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