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9월 참여연대 창립과 함께 한, 현재의 ‘사회복지위원회’ 명칭은 창립 때는 ‘사회복지특별위원회’로 ‘특별’이라는 용어가 붙어 있었다. 이 당시 ‘특별’이라는 용어가 갖는 의미는 그만큼 사회복지가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참여연대의 정체성 정립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집행위원회의 ‘특별한’ 배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회복지 부문은 일부 제도화는 갖추어 가고 있었지만 실질적 내용은 부실하였다. 특히 민중복지를 생각할 때 국민생활최저선 보장이야말로 참여연대의 시민사회운동의 실천적 모티브를 잡는데도 요긴할 뿐 아니라, 한국 사회복지정책의 방향을 잡는데도 필요한 테제로 채택하기에 적절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국민생활최저선(1996년부터 국민복지기본선으로 명칭이 변경됨) 확보운동은 처음부터 참여연대 사회복지특별위원회의 핵심 이슈로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1997년 말 외환위기와, 이에 대한 IMF 구제금융신청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제적 위기상황은 대기업의 구조조정, 부실은행의 퇴출, 공기업의 민영화 등으로 실직자들의 양산, 제조업 가동율의 급격한 저하에 의해 가족 생계에 위협을 주게 되었다. 특히 IMF 체제는 근 30여년간 지속되어 온 ‘고성장·저실업 구조’를 붕괴시킴으로써 한국 사회의 복지욕구 해결 메커니즘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고, IMF 체제하에서 예상되는 ‘저성장·고실업 구조’의 만성화로 안정된 고용에서 나오는 개인 소득이나 기업복지를 통해 복지욕구를 해결하는 메커니즘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이에 비하여 국민의 기초생활보장에 대한 국민적 요구는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표출되었다.

이러한 경제위기와 IMF 개입이 가져다 준 가장 심각한 도전 중의 하나는 대량실업의 위협과 그 치명적인 결과로부터 개인과 가족을 어떻게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가라는 점인데, IMF 체제에서 실업은 우리에게 가장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실업은 노동자 개개인에게 생존권의 근본적 위협을 가하고, 가족전체 구성원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가족해체 및 전반적인 사회해체의 위험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의 실업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의 실직 문제에 국한되는 성격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미흡한 사회보장제도의 실정은 차치하고라도 구미와는 다른 실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한 가구당 수입원이 우리의 경우 가장(家長)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가장 한 사람의 실직은 가정 전체의 실직을 의미하므로 가족 전체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였다. 버려지는 아이들, 학교와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청소년 자녀들, 갑자기 허드레 일자리조차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주부들 등 가정이 해체되기 쉬운 조건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았다. 이 당시 부랑자 2천여명은 별도로 치더라도 비공식집계에 따르면 전국의 노숙자들은 3천여명에 이르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해체 가정의 한 모습을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또한, 이 당시 우리 사회는 선진 서구 사회와는 달리 현재 외환위기상황의 악조건 하에 있었고, 고용창출 정책, 취업정보 제공, 재취업 교육등의 미흡하여 발전적 재취업의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며, 낮은 직업이동성과 취약한 실업급여 등으로 실직자들의 다수가 2차, 3차 좌절 및 스트레스 연쇄충격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실업이 장기화될 경우 폭력, 자살 등의 공격적 행동,음주·마약 등 은둔적 행위, 가족해체나 개인파산에 따른 노숙자의 증가 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속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기초생활보장을 토대로 하는 총체적인 사회안전망 장치로서의 사회보장제도가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미흡함을 직시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랜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실업에 대한 사회안정망 장치가 상당한 수준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실업자의 연대시위가 사회적 공감을 얻고, 실업수당을 받는 것이 하나의 권리로 인식되고 있는 선진국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이 당시 우리나라의 경우 산업화가 시작된 1960년대 이후 몇몇 특수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고용에 가까운 고용상태를 유지해 왔고, 실업 문제의 해결은 가족의 몫이 되어 온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경제사회 위기 상황에서 이러한 가족의 기능 자체도 상당히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기초생활보장 장치로서의 사회복지제도는 이제 걸음마 수준에 있을 뿐이었다. 특히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실업, 산업재해 등 위험발생 영역이 높고, 일단 위험이 발생하면 가계파탄 가능성이 큰 전체 미용자의 30%에 육박하고 있는 임시직(계약직) 노동자들의 경우, 고용보험, 산재보험, 의료보험 등에서 제외되는 비율이 13.7%에서 42.5%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맞이한 급작스러운 대량 실업사태에 직면해서 개별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그야말로 실업이라는 사회적 위험 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처럼 국가 차원의 사회안전망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통합의 핵심적 역할을 해온 가정의 해체를 방치하면 사회전체의 위기가 초래될 것은 뻔하였다. 특히 가장이 무너진 가정은 연쇄 충격을 겪게 되는데, 가족 중 가장 약한 부분인 어린이, 노인 등이 먼저 희생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를 대신해 과도한 짐을 지고 있는 가족공동체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 사회복지정책의 방향을 개인단위 중심에서 가족단위로 전환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삶의 기본이 되는 직접적인 경제적 지원은 정부가 받되. 민간단체나 종교단체는 가족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도록 각종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 때, 가족의 소득 보장을 위해서는 현행 생활보호제도를 국민의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전면 확대 개편함은 물론이고 고용서비스를 내실화해야 했다. 그러나 대량실업 상황에서는 극히 취약한 장·단기 실업에 대한 기초생활 보장을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이 무엇보다 우선 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이 당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실업의 근본 해결책이 경제정책에 의한 고용창출이지만 이러한 가족문제를 고려할 때, 실업문제를 사회정책의 영역으로 보는 시각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즉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실업문제에 대한 사회정책의 일환으로서 기초생활보장을 토대로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확립과 함께 가족에 대한 사회서비스 기제를 포함한 총체적인 사회안전망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그 당시 매우 시급함을 인식하여 바로 실천에 옮기는 시민사회운동의 주요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민생활최저선 확보운동은 그 후 우리나라 사회복지운동의 핵심 이슈로 등장하여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과 함께, 2000년부터 우리나라 공공부조제도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결실을 맺어가기 시작한 단초였다고 하겠다.

조흥식 / 1대 참여연대 사회복지 위원장․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07/02/11 00:00 2007/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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