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에게도 무게가 있습니다
월간 복지동향/2000 :
2000/12/10 00:00
고요한 호수에 작은 나룻배가 있고 그 나룻배 한 끝에는 육중한 돌탑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나룻배 다른 한 끝에는 작은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룻배가 한쪽으로 기울거나 흔들림 없이 평화로운 수평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로운 나룻배 밑에 화가는 작은 글씨로 '새에게도 무게가 있습니다.'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오래 전 어느 사무실 문에 걸려 있던 이철수님의 판화를 본 기억이 그 후에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아 여러 자리에서 소개하였습니다. 상계동 나눔의집에서 빈민선교를 하던 나에게 그 판화는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의미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하여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였었습니다. 성서에는 아흔 아홉 마리 양떼를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길을 떠나는 목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릴 적 나는 그 비유를 들을 때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목자가 길을 떠나 있는 동안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 양떼 가운데 열 마리, 혹은 더 많은 양들을 잃어버릴지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는 목자의 무모함과 남은 아흔 아홉 마리 양떼가 목자가 떠난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 여기며 감히 용기를 내어 신부님께 그 의문을 묻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지난 후 스스로 그 답을 찾았습니다.
육중한 돌탑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기울어 뒤집어지지 않는 나룻배의 평화스러운 수평이나 아흔 아홉을 남겨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사랑은 모두 합리적인 사고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삶에 가장 소중한 진실이 눈으로 볼 수 없고 그것을 수량화하거나 계량화할 수 없는 가치라고 한다면 나룻배의 평화스러운 수평이나 목자의 무모한 사랑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심화되고 있는 배제(排除)와 소외(疎外)로 인한 상처와 위기를 치유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시급하게 회복하여야 할 가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쟁력과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배제와 소외는 어쩔수 없는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 그 어느 사람도 자신이 그 배제와 소외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가치로 무장된 그 어느 사람도 자신이 갖는 고유한 인격적 가치와 존엄이 경쟁력과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계량화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저울에 달 수 없는 한 마리 작은 새에 깃든 생명의 무게는 그것이 아무리 가벼워 보일지라도 육중한 돌탑의 무게로 기울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소외와 배제로 고통받는 한 사람을 버려 둔 채로는 아흔 아홉의 개인도, 집단도 결코 행복하거나 온전해 질 수 없다는 진실은 우리가 왜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작은 사람들과 연대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성문 밖'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성문 밖'은 당시에는 천벌(天罰)로 여겨졌던 나병환자들이나, 가난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죄인이라는 낙인(烙印)과 모든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배제와 소외의 땅이었고 분단의 땅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분단은 38선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불가피한 구조조정의 현장에, 그 구조조정 과정에서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의 현장에,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실업자들의 현실에, 가족과 집을 잃은 노숙자들의 고통에 분단의 장벽이 있습니다. 빈민이라는 낙인으로, 실업자라는 낙인으로, 노숙자라는 낙인으로 성문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문 밖에서 살아가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빵을 성문 안에서 시혜적으로 나누어주는 알량한 자선(慈善)이 아니라 다시 이웃들과 가족들이 살아가는 마을로, 성문 안으로 부르는 초대와 환대(歡待)일 것입니다.
오래 전 어느 사무실 문에 걸려 있던 이철수님의 판화를 본 기억이 그 후에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아 여러 자리에서 소개하였습니다. 상계동 나눔의집에서 빈민선교를 하던 나에게 그 판화는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의미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하여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였었습니다. 성서에는 아흔 아홉 마리 양떼를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길을 떠나는 목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릴 적 나는 그 비유를 들을 때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목자가 길을 떠나 있는 동안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 양떼 가운데 열 마리, 혹은 더 많은 양들을 잃어버릴지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는 목자의 무모함과 남은 아흔 아홉 마리 양떼가 목자가 떠난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 여기며 감히 용기를 내어 신부님께 그 의문을 묻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지난 후 스스로 그 답을 찾았습니다.
육중한 돌탑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기울어 뒤집어지지 않는 나룻배의 평화스러운 수평이나 아흔 아홉을 남겨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사랑은 모두 합리적인 사고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삶에 가장 소중한 진실이 눈으로 볼 수 없고 그것을 수량화하거나 계량화할 수 없는 가치라고 한다면 나룻배의 평화스러운 수평이나 목자의 무모한 사랑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심화되고 있는 배제(排除)와 소외(疎外)로 인한 상처와 위기를 치유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시급하게 회복하여야 할 가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쟁력과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배제와 소외는 어쩔수 없는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 그 어느 사람도 자신이 그 배제와 소외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가치로 무장된 그 어느 사람도 자신이 갖는 고유한 인격적 가치와 존엄이 경쟁력과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계량화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저울에 달 수 없는 한 마리 작은 새에 깃든 생명의 무게는 그것이 아무리 가벼워 보일지라도 육중한 돌탑의 무게로 기울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소외와 배제로 고통받는 한 사람을 버려 둔 채로는 아흔 아홉의 개인도, 집단도 결코 행복하거나 온전해 질 수 없다는 진실은 우리가 왜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작은 사람들과 연대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성문 밖'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성문 밖'은 당시에는 천벌(天罰)로 여겨졌던 나병환자들이나, 가난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죄인이라는 낙인(烙印)과 모든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배제와 소외의 땅이었고 분단의 땅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분단은 38선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불가피한 구조조정의 현장에, 그 구조조정 과정에서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의 현장에,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실업자들의 현실에, 가족과 집을 잃은 노숙자들의 고통에 분단의 장벽이 있습니다. 빈민이라는 낙인으로, 실업자라는 낙인으로, 노숙자라는 낙인으로 성문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문 밖에서 살아가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빵을 성문 안에서 시혜적으로 나누어주는 알량한 자선(慈善)이 아니라 다시 이웃들과 가족들이 살아가는 마을로, 성문 안으로 부르는 초대와 환대(歡待)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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