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사태'가 우리 사회에 기여한 바가 있다. 압축성장과 거품경제의 폐해를 각인시켰으며, 사회안전망의 절박성을 깨닫게 했다. 동시에 그 동안 은폐되었던 극빈층 문제를 일반인의 시야에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고도성장 과정에서 사회·경제적으로 배제되었던 노숙자, 쪽방 사람들이 사회적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이미 노숙자가 거리 구석구석을 메우고 있었던 선진국과 비교해서, IMF 사태 이후 급작스럽게 노숙자가 늘어난 우리나라의 극빈층 보호 정책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무엇보다 노숙자 문제에 대해 어떤 나라보다 신속하고도, 온정적인 지원책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대개 노숙자 정책에는 가치관이 개재되기 때문에, 보호 및 지원과정에 정치적 논란이 수반되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뛰어넘은'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파격적인' 응급보호대책은 우리 사회가 노숙자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목표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뒤숭숭한 사회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더구나 최근 노숙자 문제가 일반인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자 정부 역시 응급보호에만 안주하려는 현상유지 경향이 뚜렷이 감지된다. 긴박한 경제난이 완화되기도 했지만 노숙자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생략된 상태에서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이는 쪽방지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무엇보다 급한 것은 노숙자와 쪽방으로 대표되는 극빈층 대책을 '정상화'시키는 것이다. 임시대책으로 시행되고 있는 노숙자 지원사업을 제도화·공식화해야 하며, 여전히 부실한 사회안전망 속에서 노숙위협을 받고 있는 쪽방거주민에 대한 지원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쪽방 거주자처럼 사실상 노숙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공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고 거리노숙, 쪽방, 부랑인시설을 연계하는 종합적인 대책수립이 시급하다. 거리상담에서부터 임시응급보호, 재활지원, 자립지원 등으로 체계화된 서비스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고령, 장애, 알코올중독, 정신요양 등 지원이 필요한 유형별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실제로 노숙자 쉼터나 부랑인 시설에는 시급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방치되어 있다. 마땅히 노인요양 시설이나 장애인 시설에 입소해야 할 사람들조차 시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임시시설에 의탁되어 있는 것이다.

노숙자지원 제도화·체계화 수준은 노숙자를 그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자원을 얼마나 투여하기로 합의했는가 하는 수준을 반영한다. 미국에서도 1980년 후반에라야 노숙자 지원에 관한 종합적인 제도화가 가능했다. 또 일본은 거리노숙자만 2만 명을 넘었지만 제도화 논의는 민간에서 극히 부분적으로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 노숙자 지원을 위한 제도화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노숙자에 대한 국민인식(여론), 지원사업 참여자들의 의지와 행동(운동), 정부의 관점과 의지(정책)가 균형을 이룬 수준에서만 제도화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형태, 어떤 수준의 제도화이든 ①응급서비스 제공, ②(임시적인) 주거제공, ③재활대책, ④취업지원대책, ⑤민간참여, ⑥재원확보 및 배분, ⑦각급 정부의 역할 등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수준에서도 가능할 뿐 아니라, 시급히 제도화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 노숙자 관련 시설을 공식화하여야 한다. 쉼터에서 생활하는 노숙자들에게 최소한의 시설기준을 적용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보호사업 종사자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이는 부랑인 시설의 개념을 재규정하고 관련 운영규칙을 수정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부랑인 시설을 장기생활시설로 인정하는 가운데 노숙자 시설을 실질적인 단기보호시설에 포함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시설기준 등을 일반적인 사회복지시설과는 달리 할 필요가 있다. 노숙자들의 다양한 특성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최소기준만 충족하면 제공 서비스나 프로그램에 따라 개별적인 심사를 통해 지원하는 방법이다.

또 한가지 필수적인 일은 지방정부의 참여이다. 물론 현재도 서울시 등 일부에서는 노숙자 응급보호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은 '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서울로 가면 잘 해 준다더라"며 거주 지역을 떠날 것을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서비스가 각 지방자치단체 별로 균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별도 입법이 바람직하지만, 우선은 보건복지부의 업무지침을 통해서라도 최소한의 서비스 제공을 강제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동시에 '주거부정'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제공받아야 할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지원해야 한다. 이들은 기초생활보장 대상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의료서비스도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노숙자나 쪽방 거주자 문제는 단순한 경제난, 실업난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미 대부분은 오랜 세월을 빈곤과 소외 속에서 살아왔고, 가족이 무엇인지 알 기회조차 없이 사실상 고아처럼 자라왔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건강해 보일 지 모르지만, 일할 의욕이나 동기부여조차 되지 않은 채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집단인 것이다. "왜 일을 않느냐"고 묻기 전에,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 먼저다.

따라서 정부가 이러저러한 대책을 세우도록 촉구하는 일 못지 않게, 노숙자에 대한 사회의 무지와 편견, 멸시에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약자에게 모든 도덕적 비난을 퍼붓는 방식으로는 노숙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응급보호가 성공적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노숙자를 일반인의 시선에서 감추려는 또 다른 방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종전의 단속정책과 본질이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노숙자 스스로 자신의 삶과 소재지를 선택할 '권리'를 부여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숙자를 권리의 주체로 세우려는 '운동'이 첫단추가 될 것이다.

김수현 /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연구위원
2000/12/10 00:00 2000/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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