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을 둘러싼 논쟁으로 우리는 보건분야를 보다 근원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의약분업이라는 정당한 의제가 정책 행위자들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원래 의도와 다른 모습으로 귀결되고 있는 과정을 상기하면 이러한 재검토의 필요성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이번 사태는 시민들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자임한 시민단체들에게 보건의료 문제를 원칙에서부터 다시 보아야 할 과제를 던져 주었다.

의약분업 구상은 사회계획의 한 방법인 이른바 "이성적" 접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출발했다. 의약미분업 상태의 전근대적이고 기형적인 현실에 합리성을 부여하자는 발상이었다. 이들은 의료 공급측 (보건의료인)의 주도로 짜여진 현 보건제도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즉, 의료 수요측 (환자와 일반대중)의 보건 욕구를 적절히 통제해서 역으로 공급측의 불필요한 공급을 줄일 방편으로 의약분업이라는 합리성을 모색했다.

그러나 권위주의 체제가 아닌 다원주의 사회의 속성상 이해당사자들의 입김이 배제된 "이성적" 사회계획을 온전하게 추구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예상했던 대로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측은 사회계획의 "증분적" 접근을 옹호했다. 이들의 논리를 압축하면 역사적 현실을 인정하고 이해 당사자들의 기득권에 심각한 변화가 올 수 있는 정책도입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자유방임적 정책의 옹호였다.

전자의 흐름을 대표한 측은 합리적 보건행정 관료와 진보적 보건단체였고, 후자의 흐름을 주도한 측은 현상고착적 의료계와 수구적 사회세력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이라면 의약분업의 원칙 자체를 반대하기는 힘들었다. 또한 후자의 온갖 상황논리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실상의 이익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후자가 처음부터 이 문제가 이해관계임을 드러내고 이익의 합리적 극대화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훨씬 정직하고 내실있는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스콧 스나이더가 "한국형 협상"의 특징으로 지목한 명분론에 입각한 행동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물론 시민단체는 진보적 보건단체의 주장에 동조해 의약분업을 찬성했다. 그런데 결과는 원안에서 대거 후퇴된 형태로 귀결되고 있다. 의약분업 사태는 "이성적" 사회계획의 또 한번의 실패로 기록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해당사자의 저항이 워낙 심했다는 이유만으로는 실패의 뿌리를 설명하지 못한다. 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 속에서 전문직 이익집단이 갖는 의미를 무시하고서 단순히 의료문제를 합리성의 추구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이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

전문직 이익집단

제프리 밀러슨은 전문직이 여타 직종과 다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조직화되어 있다, 행동강령을 갖추었다, 이론적 지식에 근거한다, 교육과정이 엄격하다, 시험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업무의 성격이 이타적이다. 피터 노크스는 여기에 덧붙여 전문직의 특징은 그것의 필수불가결성에 있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전문직의 지식학적 권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엘리엇 프리드슨은 전문직의 특징은 전문성이 아니라 자신의 업무를 타인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업무통제권의 독점에 있다고 보았다. 이번 사태에서도 의료전문직은 전문성이라는 권위, "인술"이라는 규범적 윤리, 필수불가결성이라는 현실적 무기, 그리고 "의권"의 수호를 유력한 압력수단으로 구사했다. 이러한 전문직 논리의 철옹성이 버티고 있는 한 의료제도의 현상변화는 요원할 수 밖에 없다. 전문직 논리가 존재하는 한 자원의 합리적 배분 흐름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기억해야만 하겠다. 즉, 의료제도에 합리성이 부여될 때 (예를 들어 의약분업이 시행되면) 의료전문직의 경제적 이익에 타격이 올 수는 있으나 그것이 반드시 위에서 말한 전문직의 내용에 어떤 심대한 타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 자본주의권에서 가장 사회화된 의료모델로 인정받는 영국의 국립보건제도(NHS) 내에서 의료전문직의 지위가 여전히 막강하다는 것을 보아도 입증된다. 이 말은 한국에서 의료전문직의 사회적 위세를 결정하는 요인인 경제적 우월성의 쇠퇴가 반드시 전문직 권위 자체의 쇠퇴 (소위 "탈전문화")로 이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좀 덜 번다고 해서 전문성에 근거한 권력과 영향력이 감소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문직에 대한 비판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세 가지 문제제기

첫째, 전문직의 환경 개혁 관점은 전문직이 위치하고 있는 의료제도의 결함을 시정함으로써 전문직이 진정한 의미의 "인술"을 베풀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료부문에 대한 공공 투자 미비, 과당경쟁을 부추기는 낮은 수가, 의료보험 제도의 불합리성, 의약미분업 등 의료제도의 결함을 시정하면 전문직에 부수되는 문제들은 자연히 해소된다고 본다.

둘째, 전문직의 제도적 권력 약화 방안 관점에서 밀턴 프리드먼은 전문직의 제도적 권력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장치인 국가가 부여하는 배타적 시장지배권, 즉 국가면허제도를 비판한다. 로버트 알포드는 좌파적 관점에서 전문직 독점자의 비효율과 현상유지적 행태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전문직 독점을 타개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전문직의 근원적 재편 관점에 서 있는 이반 일리치는 "직업의 전문성 그 자체를 철폐"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 구성주의도 의학지식이 절대적 실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해석되고 구성된 것이라고 믿는다. 이 관점은 개인이 건강의 주체가 되어 과도하게 의료화된 보건 담론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운동의 과제

시민운동이 의약분업 사태에서 "이성적" 사회계획에 힘을 보탠 것은 현명하고도 필요한 한 처사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보건의료 문제해결에 있어 전문직의 위상 정립이 피할 수 없는 과제라 할 때 장기적으로 시민운동은 전문성이라는 지식학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수밖에 없을 것이라 예상된다. 따라서 합리적 의료제도의 모색이라는 차원과 건강담론의 주체적 탈환의 차원이 공존할 수 있는 병렬적 건강 운동이 향후 시민운동에 주어진 과제라 하겠다.

조효제 / 성공회대 시민사회단체학과 교수
2000/11/10 00:00 2000/11/10 00:0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Welfare/trackback/2508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