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와 시각의 절대빈곤
최근 대통령은 틈만 나면 '소득재분배', '빈민·빈곤대책'을 언급하고 있고, 재벌들이 이익의 1%를 빈민기금으로 마련하기로 약속하는 등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최대의 과제로 '빈곤문제'가 떠오르고 있다. 3조 5천억 원 규모의 세계잉여금의 사용처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으며, 비록 '생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긴 했지만 '복지'가 국정운영 3대지표의 하나로 선언되었다.

이렇게 빈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가속화시킨 작지만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빈곤인구 1,000만 명'이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킨 지난 11월 10일에 있었던 서울대학교에서의 포럼이 그것이다. 참여연대와 UNDP가 공동주최한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빈곤실태와 빈곤감시시스템"이라는 제목의 이 포럼에서 연구자들은 외환위기를 전후한 한국의 빈곤실태에 대한 종합적이고 실증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함으로써 세상에 '한국의 빈곤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보고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파장을 크게 한 데는 오히려 '정부'의 사후조치가 큰 역할을 하였다. 보고서 발표 이후 정부당국이 보여준 일련의 신경질적이고 과민한 반응은, 우리 사회의 '빈곤한, 너무나 빈곤한 빈곤관'의 일단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던 것이다. 이제 곧 정식출판을 앞두고 있는 이 보고서의 작업과정 전체를 되돌아봄으로써 보고서 내용만으로는 살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빈곤문제의 실태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보고서 작업은 원래 참여연대 차원에서 '김대중 대통령 1년 평가'를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1년이란 곧 'IMF 외환위기 이후 1년'이었고, 결국 대량실업, 노숙자 문제로 표면화된 우리 사회의 빈곤문제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UNDP와 접촉이 있었고, 마침 UNDP측에서도 우리와 유사한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정부측 발표통계에 대한 불신과 '빈곤감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UNDP측으로서는, 참여연대라고 하는 공신력있는 시민단체와의 협동작업에 기대를 걸었고, 서로간의 요구가 일치함을 확인한 직후 곧바로 계약이 체결되어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구자를 섭외하고 팀을 구성한 후 곧바로 중요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외환위기를 전후한 한국 빈곤실태의 변화와 그 성격, 정부정책의 문제점과 대안을 연구하겠다는 연구목표는 분명했지만, 결정적으로 '자료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실태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신빙성있는 정확한 자료가 당연한 선행조건이었지만, 참여한 연구자들은 통계청 '도시가계조사'의 한계를 한결같이 지적하였다. 특히 무엇보다도 도시근로자에 대해서만 소득자료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연구의 전체적 틀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 한계로 작용하였다. 결국 이러한 자료상의 한계 자체가 빈곤문제의 심각성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본 후, 이를 본격적으로 문제삼음으로써 향후 '빈곤감시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정리하였다.

그래서 우선 통계청 원자료와 1999년 보건사회연구원과 노동연구원이 공동작업한 "실업실태 및 복지욕구조사"의 원자료 등 구입가능한 주요자료들을 수집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욕심같아서는 직접 설문조사나 면접조사를 하고 싶었지만, 프로젝트 규모나 기간상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 기존 연구성과와 정부당국의 조사자료를 활용하는 것으로 연구의 범위를 제한하였다.

6개월간에 걸친 연구작업이 일단락되고, 원래 UNDP와 계약한대로 관련전문가와 정부와 사회단체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11월 10일 서울대학교에서 포럼을 개최하였다. 이날 포럼은 보고서에 대한 일종의 중간점검의 자리로서, 이날 지적되는 내용들을 수정·보완하여 최종보고서를 작성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포럼 자체가 제한된 토론자를 대상으로 한 다소 전문적인 자리였기 때문에 언론에 주목받을 것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실제로 그날 취재하러 온 기자들도 내용이 쉽지 않다는 불만을 많이 털어놓았고, 보도자료에 요약된 이상의 내용은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분위기였다). 참석한 토론자들도 보고서 내용에 대해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고, 다만 정부측 참석자들은 빈곤규모의 수치나 정부당국의 정책에 대해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충분히 예상된 것이었기 때문에 포럼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거의 모든 언론에서 보고서에서 제출된 '빈곤인구 1,000만명'이라는 수치를 대서특필하기 시작하였고, 이제껏 간과되었던 한국의 (신)빈곤층, 정부빈곤대책의 미비점 등에 대해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오히려 보고서를 준비했던 당사자들이 놀랄 정도의 큰 반향이었고, 프로젝트를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소기의 목적 ―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빈곤실태를 널리 알림 ― 이 이미 반쯤 달성되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이제 남은 일은 포럼에서 지적된 내용들을 꼼꼼히 검토하여 최종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제출하는 형식적 절차뿐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정부당국의 이해못할 대응으로 상황은 급작스럽게 꼬이기 시작하였다.

포럼 이후 약 일주일이 지난 시점인 11월 16일, 보건복지부는 "UNDP 용역결과 발표된 빈곤인구는 잘못된 추계입니다"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고, 이 연구내용 중 일부가 사실과 일치하지 않으며, 정부정책에 대한 국민불신조장, 국가신인도 하락을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을 가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보도자료만이 아니었다. 재정경제부와 보건복지부의 실무자들은 연구자 개인에게 수십 차례 이상 전화를 걸어 논문내용 하나하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고, 급기야 UNDP에 공식공문을 발송하여 "왜 이런 작업을 했느냐?"라는 식으로 항의표시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적 관례마저 무시한 태도였다. 뿐만 아니었다. 마치 공안대책회의를 연상시키는'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소집되고, 한국개발연구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등 국책기관들을 동원하여 보고서의 문제점을 꼬집어내기에 급급하였다. 당시 재정경제부에서 작성된 내부문서에서는 "향후 대응방안으로 정부의 직접 대응보다는 국책연구기관의 전문가들이 주요언론에 보고서의 문제점을 기고하는 방법으로 직접 대응이 빚을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것"이 제안되기도 하였다.

참여연대 역시 곧바로 공식적인 대응에 나섰고, "대외적 이미지가 빈곤으로 인한 국민의 고통보다 중요한가?"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통해 정부측 대응의 내용과 형식상의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공박하였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참여연대의 보고서가 내용상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나름의 기준을 제시하였지만, 이를 그대로 따르더라도 빈곤인구의 규모는 880만 명에 이르렀다. 도대체 1,000만 명은 많고 880만 명은 적다는 얘기인지 이해할 수 없는 비난(!)이었고, 양측의 감정은 날카롭게 대립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정부측과의 지리한 공방은, 그 이후 비록 언론을 통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계속되었다. UNDP측도 정부의 계속적인 주문에 밀려 참여연대 보고서의 발언수위나 내용의 수정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부측의 집요한 요구가 없었더라도, 내용상의 착오나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되면 보고서의 내용은 얼마든지 수정가능한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포럼에서 발표된 보고서는 '중간보고서'였고, 포럼을 공식적으로 개최한 이유도 행여 있을 수 있는 문제점을 최종보고서 발간 이전에 점검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그러한 보고서 작성과정 자체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고, 이제껏 국책연구기관의 각종 보고서들이 정부의 입김에 의해서 결과가 변질되기도 했다는 소문을 오히려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국제기구와 시민단체의 보고서에 대해서조차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데 하물며 국책연구기관에 대해서는 어떠했겠는가? 결국 UNDP의 입장을 고려하여 최종보고서 탈고 이전에 정부측 공식견해를 듣는 기회를 갖기로 하고, 보건복지부와 재정경제부에 공문을 보내 최종검토 의견제시를 부탁하였고, 약속기간보다 20여일 늦은 올해 1월 22일, 보건복지부에서 의견을 보내옴으로써 오랜 공방은 외견상 일단락되었다.

어쨌든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UNDP와 참여연대의 빈곤보고서는 지금 최종보고서 마무리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국문원고는 UNDP의 양해를 얻어 공식출판할 계획이고, UNDP 공식보고서는 내용과 분량을 축약하여 국문/영문으로 3월 말에 제출될 예정이다. 비록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번 보고서는 빈곤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안일한 시각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어쩌면 더 큰 교훈을 '보고서 밖'에서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최소한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초 통계자료조차 없는 상태에서 빈곤실태의 변화와 정책의 공과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빈곤실태를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따질 수조차 없는 '자료의 절대적 빈곤' 상태를 일단 극복해야 '내용의 상대적 빈곤' 문제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산해내는 정부 스스로도 확실히 믿지 못하는 기초자료로 과연 언제까지 분석작업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아가 통계작성에서부터 통계결과에 대한 분석 및 공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정부뿐만 아니라 학계나 시민단체의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화함으로써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이 반복되는 상황을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히 바뀌어야 할 것은 빈곤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빈곤한 시각'이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개인이 열심히 일한다고 탈출할 수 있는 빈곤이 아니고, 정부가 숨긴다고 해결할 수 있는 빈곤문제가 아닌 것이다. 충분한 사전조사에 근거하여 사회적으로 합의된 대책이 마련될 때에만 해결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보고서를 통해 연구자들이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것도 결국 이러한 주장이었다.

함부로 수치를 농락해서도 안되지만 쉽사리 수치에만 현혹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보고서의 연구결과, 빈곤인구의 규모가 '1,000만'이 아니라 '900만'으로 나왔으면 이토록 큰 사회적 관심을 못 끌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렇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빈곤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홍일표 / 참여연대 납세자운동본부 간사
2000/03/10 00:00 2000/03/10 00:0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Welfare/trackback/278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