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급성장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전세계적으로 노동운동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던 1990년대 전 기간에 걸쳐 전투적인 파업투쟁과 함께 친자본적인 국가권력과 사용자들의 억압에 강력히 저항하는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으로 성장함으로써 브라질, 남아공과 함께 제3세계 노동운동의 새로운 모범으로 거론되어 왔다.

특히 1995년 11월에 창립된 민주노총(KCTU)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그 핵심주체를 경공업의 여성노동자에서 제조업의 핵심 주력부대인 대공장의 남성 블루칼라로 이전시켰다. 이와 함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기초로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조직노동자를 망라하는 광범위한 내셔널센터로 출범했고, 이후 공공부문과 서비스산업으로 산하 조직들의 영역을 확대하면서 노동자운동의 대표성을 강화해 나갔다.

그동안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한국 사회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끼친 진보적인 영향은 실로 대단히 크다. 우선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자의 권리를 포함한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면서 성장제일주의 신화를 유포시켜온 개발독재의 모델에 대한 종언을 선고했다. 아울러 90년대의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보수화 흐름의 한 가운데에서도 독점자본의 전제적 권력 확립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였던 세력이다. 또한 기업 내부에서 민주노조를 사수하고 작업현장의 민주적인 통제권을 지켜내기 위해 수만명의 구속자와 해고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을 전개해 왔다. 이 모든 것이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의의를 정당하게 평가하도록 만드는 지점이다.

그러나 90년대를 거치면서 전투적인 노조에 대항하는 자본의 합리화 전략과 기업문화 운동, 그리고 여기에 결부된 정부의 일련의 보수적 규제완화 정책은 기업별로 분단된 조직노동자 운동의 잠재적인 균열을 이중화된 노동시장의 단절로 심화시켰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여성과 남성, 대기업과 중소 영세기업간의 노조운동의 간극을 갈등상태로 만들어갔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진보적 비전과 사회적인 영향력은 간단치 않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90년대의 규제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90년대 초반 이후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의 독점대기업들은 시장지배력을 기반으로 수직계열화된 하청기업들에 대해 비용압박과 적기생산에 따른 재고관리의 부담을 떠넘김으로써 중소기업의 임시직 고용을 늘리도록 만들었다. 이와 함께 대기업 내부에서도 자동화와 합리화, 작업조직의 개편 등으로 기능적인 유연성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정규직 고용의 억제와 임시직과 사내하청, 아웃소싱의 급속한 증가를 통한 수량적 유연성의 확대는 전통적인 조직노동의 기반을 잠식해 들어왔다. 서비스산업의 확대와 여성취업의 증가 역시 파트타임과 임시직, 계약직, 위장된 독립노동자의 증가를 가속화시켰고 이러한 영역에서의 노동자 조직화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공공부문에서도 신자유주의적 '작은 정부론'에 기초한 민영화와 하청, 아웃소싱의 증가로 인해 용역, 파견 등 비정규노동자들이 빠르게 증가해왔다.

이러한 경제 전반의 노동유연화 공세는 기업별 노동조합에 대해 아주 효과적인 공격수단이 되었으며, 조직노동은 여기에 효과적인 저항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없거나 가입하기 어려운 비정규 노동자가 늘어나는 반면, 기업차원의 구조조정에 대한 정규직 노조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영향력과 노조조직률은 줄곧 감소해왔다. 90년에서 97년까지 임금노동자는 227만명(20.8%)이 늘었지만 노조원 수는 190만명에서 150만명 수준으로 40만명이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1990년에 18.4%를 기록하던 노조조직률은 1997년에 이르러 11.2%로 떨어졌다.([표1] 참조)

비정규 고용의 급증과 노동운동의 위기

축소되고 있던 조직노동은 미조직 노동자와 주변부 노동자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채 그동안의 성과들을 지켜내는데 급급함으로써 노동자 내부의 이질화와 분단화를 방치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제조업의 대기업의 생산직 노동자들은 강력한 기업별 노동조합을 무기로 임금인상 투쟁과 기업복지 수혜를 증가시키면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과의 격차를 줄여나갔지만, 공장 안팎의 늘어나는 저임 하청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상 외부자의 태도를 취했다. 아울러 노동운동 안에서 여성노동자의 지위와 노동시장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부분적인 개선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한계에 부딪쳐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잠재된 노동운동의 내부 문제들은 1997년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대규모 정리해고와 정규직의 비정규직 대체, 비정규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의 급속한 하락과 불안정화, 빈곤화가 진행되면서 공식통계상으로도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노동자가 임시일용직 노동자로 채워지게 되었다.

비정규 고용의 급속한 증가는 법·제도적인 요인, 경기순환상의 요인, 산업구조 변화, 그리고 노동력의 수요자인 기업의 고용전략과 노동시장에서의 공급측 요인 등이 거론되고 있으나, 전반적인 비정규 고용의 확산추세나 비정규 취업의 비자발성을 드러내는 각종 조사결과를 통해서 볼 때, 가장 주된 원인은 정치경제적 환경 변화에 따른 노동수요자인 기업의 노동력 관리전략의 '유연화'와 노동입법상의 규제완화, 친자본적인 노동정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IMF 관리체제라는 미증유의 위기 국면에서 기업들이 수량적 유연화를 공격적으로 구사한 것이 가장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정리해고제의 도입과 근로자파견법의 제정, 공공부문의 민영화 등 제도상의 변화가 이를 더욱 촉진시킨 것이었다.

새로운 노동운동, 새로운 사회운동의 가능성

반면 2000년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비정규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은 침체되고 축소되고 있는 기존의 노동운동에 강력한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다양한 고용형태에 대응하여 다양한 노동조합 조직형태가 실험되고 있으며, '차별철폐, 정규직화, 노동권 보장, 사회복지 확대' 등을 주된 요구로 내걸고 있는 이들의 운동 목표는 경제위기 이후 극심한 불평등과 사회정의의 실종을 우려하면서 새로운 진보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던 한국의 사회운동에 대해 새로운 자극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금까지 비정규노동자들의 조직화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대표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랜드노조의 경우에서처럼 정규직 노동조합이 임시 파견직까지 조직대상을 확대한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한국통신계약직노조, 방송사비정규운전직노조, 명월관노조, 롯데월드비정규직노조, 홍익회매점노조 등 기업내 비정규직들이 결성한 노동조합들이 다수 있었다. 캐리어, 볼보, 한라중공업 등에서는 사내하청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재능교육, 대교 등 학습지교사들의 노조결성은 전국적 단일조직 결성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전국보험모집인노조와 같이 직종별노조의 결성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전국초중고시간강사노조는 파트타임 직종노조를 탄생시켰다.

또한 지입제 레미콘 운반차량을 운전하는 전국건설운송노동조합

과 타워크레인기사노조, 전국보험설계사노동조합 등은 사용자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개인사업자 등록을 강요받았던 개인도급 노동자들이 결성한 노조이다. 이와 함께 전국여성노조 등 비정규직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을 조직대상으로 하는 노조 결성 흐름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편 부산지역일반노조를 첫 시작으로, 경기도를 비롯한 수도권과 진주, 안양, 마산, 울산, 수원, 평택 등 몇몇 지역에서 이미 노조를 결성했거나 노조설립이 준비되고 있는 지역일반노조운동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끈질긴 인내와 줄기찬 투쟁을 통해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 특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시민운동의 연대',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연대' 등으로 연대의 폭을 확장하고 있다. 서울대 학생들은 학교 내의 시설관리 청소부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총장실 점거농성으로 연대에 나섰고, 이랜드노동자들이 온갖 부당노동행위에 시달리고 있을 때는 할인매장이 들어선 지역의 아파트단지 주부들이 나서서 노조의 투쟁을 응원했다.

이밖에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비정규노동자 투쟁에는 수많은 학생운동 활동가와 인권단체의 회원들이 결합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비정규 노동자 운동을 계기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전형을 발견하려는 시도들이다. 인권과 민주주의, 평등을 위한 사회운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노동조합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강화되어 온 세계노동운동사의 교훈을 다시 떠올릴 때, 비정규직의 조직화가 진보적 사회운동과 새롭게 연결되고 있는 현재의 양상은, 비정규 노동자 운동이 21세기 한국 노동운동의 반성적 성찰을 통한 새로운 노동운동(New Unionism), 새로운 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으로 나갈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게 만들고 있다고 하겠다.

박영삼 /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기획국장
2001/07/10 00:00 2001/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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