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향2] 중앙생활보장위원회에 보내는 릴레이 편지
최저생존도 보장 못하는 최저생계비, 이제 바꿔야 합니다.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지난 8월 22일 중앙생활보장위원회는 2008년도 최저생계비를 전년 대비 5%가 오른 월 126만5864원(4인가족 기준)으로 결정했다. 이는 현 최저생계비 수준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며, 평균소득에 대비한 최저생계비의 상대적 수준이 하향화 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 결정이다. 또한 올해에도 최저생계비의 현실화를 위해 결정 방식을 상대적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시민사회단체의 주장은 반영되지 않았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위원장 : 김종해 가톨릭대 교수)는 최저생계비 결정에 앞서 최저생계비의 적정화와 상대적 계측 방식 도입을 촉구하기 위해 8월 19일부터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위원들에게 ‘최저생존도 보장 못하는 최저생계비, 이제 바꿔야합니다’ 라는 긴급 릴레이 편지를 보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들과 2004년 희망UP 캠페인 참가자, 2007년 복지학교 참가자들이 보낸 릴레이편지 전문을 싣는다.
<릴레이 편지 순서>
①『양극화 시대의 마지막 안전망, 최저생계비의 상대적 수준 하락을 막아야 합니다』
/ 수신: 변재진 보건복지부 장관, 발신: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
②『최저생계비, ‘현실’을 반영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 수신: 김석동 재정경제부 차관, 발신: 송정섭(학생)
③『가난과 편견에 갇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세요』
/ 수신: 문형표 KDI 재정복지팀장, 발신: 김연수(학생)
④『정부의 양극화 해소 의지, 정녕 있는 것입니까?』
/ 수신: 반장식 기획예산처 차관, 발신: 이태수 꽃동네현도복지대 교수
⑤『최저생계비 계측, 상대적 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 수신: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위원, 발신: 윤홍식 전북대 교수
* 이 편지는 프레시안(www.pressian.com)을 통해 동시에 공개됐다.
릴레이 편지 ①
양극화 시대의 마지막 안전망,
최저생계비의 상대적 수준하락을 막아야 합니다
남 기 철 (동덕여대 교수,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
변재진 보건복지부 장관님께
안녕하십니까? 변재진 보건복지부 장관님
우리사회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고 저출산․고령화의 흐름 속에서 복지의 역할이 점점 막중해지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어려운 직책을 수행하시느라 어려움이 많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며칠 후인 9월 1일은 최저생계비가 공표되는 날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제도는 아직도 그 보장수준이 미비한 상황이라 공공부조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나라의 공공부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는 최저생계비가 수급자를 판정하는 주요한 기준이 되며 동시에 급여수준의 기준으로 적용되고 있어 그 수준의 결정에 많은 관심이 모아집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최저생계비의 수준이나 그 계측방법이 부적절하여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취지를 무색케 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상대적 수준 하락으로 생활수준 반영하지 못하는 최저생계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처음 시행되던 시기에 최저생계비가 계측되어 발표되었고, 5년 후인 2004년, 그리고 법 개정으로 다시 3년 후인 올해 최저생계비가 계측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최저생계비가 우리 국민들의 평균적인 생활수준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급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채 10년이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에 우리사회 중위소득이나 평균소득(혹은 중위지출이나 평균지출)에 비교할 때, 최저생계비의 상대적 수준은 10% 가량 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보장해 주는 수급의 정도도 마찬가지로 계속 수준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3년에 한 번씩인 계측년도에 절대적 빈곤선의 전물량방식을 토대로 최저생계비 수준을 결정하는 계측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비계측년도에는 물가상승률 이상의 상승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법에는 분명히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가와 아울러 국민의 생활수준의 변화를 감안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최저생계비 수준은 국민의 생활수준 변화를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물량방식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필수 품목의 가격을 합산하는 방식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필수품목의 결정이 매우 자의적입니다. 특히 최저생계비 산정을 위한 논의과정에서는 연구진이 조사결과로 명시한 필수품목의 내용마저도 임의적으로 삭제되기 일쑤입니다. 지난 2004년의 최저생계비 결정과정에서 빈곤층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국민이 가지고 있고 통상 필수품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충분히 충족하고 있는 휴대폰을 ‘국민정서’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품목에서 제외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대체재가 충분한 수량을 동반하여 비용이 대신 인정되지도 않았습니다. 필수품의 항목을 더한다는 전물량방식이야말로 실상은 ‘필수품’의 모호함 때문에 가장 주관성과 자의성이 많이 개입되는 생계비 계측방법입니다. 또한 필수품의 선정과 가격합산 방식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의 변화를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난 2004년 중앙생활보장위원회에서는 다양한 최저생계비 계측방법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었습니다. 또 같은 해 최저생계비 관련 시민단체의 행사에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상대적 빈곤선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상대적 방법은 중위소득이나 평균소득 대비 일정한 수준을 최저생계비로 정하여 국민의 평균적인 삶의 질이 상승 또는 하락하는 정도를 반영하는 것을 요체로 합니다. 물론 그 수준이 높다면 좋겠지만 재정적 여력이나 다른 보건복지 프로그램과의 관계성을 감안할 때 현실적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OECD를 포함하여 많은 서구의 연구자나 공식적 통계치가 국제비교 등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중위소득의 40%, 50%, 혹은 60%라는 기준은 사용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최근의 최저생계비 실계측이 이루어졌던 2004년의 최저생계비가 당해년도의 중위소득이나 평균소득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율을 최저생계비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미 우리사회가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최저생계비이므로 그 수준을 유지하자는 것입니다.
양극화 심화되었어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수는 그대로
장관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우리사회 저소득층에게 사실상 유일한 안전망이고 소득보장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공공복지 프로그램입니다. 제도 출범 이후 약 150만 명을 수급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공공부조의 대상자는 빈곤문제의 정도나 특히 양극화의 정도에 따라 그 수가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최근 수 년 간 우리사회의 빈곤문제, 양극화 심화 등은 자주 언급되어 온 것이고 많은 연구자와 특히 정부에서도 그 심각성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정부의 문건과 로드맵에서 양극화 심화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공부조 대상자가 전혀 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간단합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너무 협소한 수급대상범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한다면 최저생계비의 수준을 실질적으로 계속 떨어뜨려 수급대상자의 수를 억제해 왔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그 시행이 이미 7-8년이 지난 2007년에도 사실상 지난 20세기 말의 최저생계비 수준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최저생계비 계측과정이 지속되는 한 우리사회는 계속 20세기 말의 보호수준에 머물러 공공부조는 점점 취약한 프로그램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양극화가 무엇입니까? 본질적으로 ‘상대빈곤’과 관련됩니다. 국민의 ‘상대적 박탈감’과 관련됩니다. 세대간으로 악순환 되는 빈곤의 절망 속에서 사회적 통합성이 붕괴되는 것입니다. 양극화의 심각성을 인정한다면 그에 대응하는 프로그램도 그에 어울리는 상대적 성격을 견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단지 ‘죽지 않을 정도의 생존유지 기준인 구휼선’이어서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기준선으로 사용하고 있는 최저생계비가 ‘상대적인 수준’을 유지하여 더 이상의 양극화와 사회적 배제를 용인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다른 소득보장 프로그램이 취약한 현실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 중요합니다.
최저생계비, 상대적 수준 떨어지지 않도록 결정해야
장관님!
지금은 정부 특히 보건복지부의 양극화 대처 의지가 정말 중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최저생계비의 수준과 계측방법의 결정은 그 의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고 생각됩니다. 며칠 후에 있을 2008년도 최저생계비 발표에서 우리 정부가 양극화와 빈곤문제 해결의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2007년 8월 19일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남 기 철
릴레이 편지 ②
최저생계비, ‘현실’을 반영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송 정 섭 (2004년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체험자)
김석동 재정경제부 차관님께
김석동 차관님 안녕하십니까? 무더운 여름에도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시고 관리하시는 노고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2004년 여름, 참여연대 주최로 실시된『최저생계비로 한 달 나기, 희망 up!』캠페인에 참가했던 참가자 중 한 명입니다. 저는 2004년도에 최저생계비만을 가지고 한 달을 생활하면서 최저생계비가 최저라는 이름하에 사회안전망의 보조역할에만 그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도 수급자 수와 급여액 등 수치상의 변화만 있어왔을 뿐 현실은 2004년도 그대로라는 것에 답답함을 느껴 편지를 띄웁니다.
최저생계비로 한 달을 살아보니... 돈 때문에 마음대로 아프지도 못해
저는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캠페인에 2인가구로 참여하면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가난 속에서 내일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해 최선을 다 하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2인가구의 최저생계비 기준인 60만원으로 한 달을 버티면서 아주 기본적인 욕구까지 거절당해야 했고, 이는 의욕에 넘쳤던 초심마저도 무너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우선 집세로 15만원을 지불하고 각종 공과금마저 제외하니 40만원이 못 되었습니다. 식료품비,문화오락비,교통통신비,피복신발비,의료비를 모두 포함하는 생활비가 40만원. 두 사람의 한 달 식료품비를 위해서는 장마에 망가진 신발은 당연히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먹는 것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망가진 신발은 체험이 끝날 때까지 가슴에 박히는 못이 되었습니다.
체험이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싸워야 했던 것은 휴식처가 되어야할 집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적은 돈으로 얻은 집안 곳곳에는 곰팡이가 피어있고, 습도도 높아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고 답답했습니다. 빨래를 해도 잘 마르지 않았고, 새 옷을 사고 싶었지만 남은 생활비에서는 그것마저도 사치로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있던 옷도 곰팡이가 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장실도 집안에서 갈 수가 없어 동네에 하나있는 공동화장실을 사용해야 했고 씻을 때에도 좁은 화장실에 가득 찬 곰팡이들을 피하느라 다 씻고 나오면 온 몸이 뻐근할 정도였습니다. 그나마도 여름이라 난방비 걱정이 없었으니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2007년에 1인가구의 주거비로 책정된 금액이 7만7천원이라니,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집은 대체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최저생계비는 용돈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금액입니다
무엇을 사더라도 가장 싼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보니 개인의 기호나 욕구가 거절당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아플 때마다 돈 계산을 해야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삶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요인이었습니다. 한 달 동안 동네주민들의 가계부를 조사하면서 현실은 이보다 더 극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최저생계비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누군가는 최저생계비가 부족한 금액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최저생계비를 용돈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최저생계비는 용돈이 아닌 먹고 살기위해 필요한 생계비용입니다. 하루 밤이 아닌 한 달을 보내는 데 7만 7천원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최저생계비입니다.
너무 낮은 최저생계비, 실질 빈곤층 사회안전망에서 배제해
최저생계비에 왜 이러한 현실이 반영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이는 최저생계비의 계측에 현실이 아닌 물가상승율만이 고려되고, 최종 결정과정에서 예산에 맞춰 역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정부와 대다수의 국민들 중에서 최저생계비의 금액만을 보고, 최저생계비가 최저생활의 이상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2007년도 4인가구의 최저생계비만 보더라도 약120만원으로 보통의 국민이 보기에 분명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그러나 이 금액에 현물급여와 소득인정액이 차감되고 나면 실제로 받게 되는 급여액은 최저생계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2006년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현황 자료를 보면 4인가구 최저생계비는 117만원이지만, 평균적으로 4인 가구 수급자들이 받는 생계비는 약38만원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저생계비 자체만을 보는 이들 때문에 겉만 최저생계비이지 그 속은 최저생존비에도 못 미치는 현실이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기준 조차도 최저 이하의 생활을 해야 하는 수준이며, 그 수준으로 인해 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차상위계층을 사회안전망으로부터 배제시키고 있습니다. 때문에 현물급여와 소득인정액을 차감한 실질적 최저생계비는 최저생존비에도 못 미치며, 국민들의 실질적인 사회안전망이 되기 위해서는 최저생계비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삶을 보장하는 최저생계비가 되어야 합니다
존경하는 김석동 차관님. 최저생계비를 결정하는 것은 정말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저생계비는 사회보장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에서도 여러 기준이 되고 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잘 압니다. 더욱이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할 수 있는 현실적인 최저생계비를 정한다 해도 한정된 예산 때문에 최저생계비의 무조건적인 인상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저생계비 인상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최저생계비는 무엇보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최저생계비로는 국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삼국지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청년 유비가 물살이 센 강을 건너려 할 무렵 한 노인이 강 앞에서 유비에게 호통을 치며 자신을 업고 강을 건너달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유비는 그 노인을 업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인은 갑자기 유비에게 반대편에 짐을 놓고 왔으니 다시 자신을 업고 되돌아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유비는 이번에도 노인을 업고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갑니다. 노인이 유비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처음 강을 건넜을 때 자네의 길을 갈 수 있었는데 왜 나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는가?” 유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약 제가 처음 강을 건너서 그냥 가버렸다면 제 일을 다 못한 것이기에 일의 수고가 절반으로 줄지만, 또 다시 한 번 더 왕복을 한다면 그 수고는 두 배로 되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최저생계비는 일의 수고를 반으로 줄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최저생계비가 국민들의 기본적인 삶과 인간으로서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을 때 그 수고는 두 배, 아니 그 이상이 될 것입니다.
김석동 차관님께서 최저생계비를 아까운 예산낭비가 아니라, 국가라는 울타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로써, 국민들 모두가 사회안전망의 보호 속에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며 함께 일어설 수 있도록 최저생계비에 현실을 반영하고 실질금액의 인상을 위해 힘써주실 것을 믿으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2007년 8월 20일
송 정 섭 (학생, 참여연대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희망UP! 참가자)
릴레이 편지 ③
가난과 편견에 갇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세요
김 연 수 (2007년 희망UP 복지학교 참가자)
문형표 KDI 재정복지팀장님께
위원님 안녕하세요. 저는 광운대 행정학과 학생 김연수라고 합니다. 저는 7월 한 달 동안 ‘거침없이 희망 UP! 최저생계비를 말하다’ 복지학교에 참가해 최저생계비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게 되었고, 이렇게 위원님께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행정학을 배우면서 저는 정부가 공공분야를 다루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최선으로 가져야 할 가치가 공익이라는 것도요.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가 과연 그러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주류 행정학이 전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과도한 복지는 경제에 저해된다고 합니다.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행정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공익을 위한 길일까요. 공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사람과 힘이 센 사람들만을 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저는 빈곤층에 대한 편견과 최저생계비의 비현실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가난과 편견 때문에 희망을 버린 ‘사람’들을 생각해주세요
흔히들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면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갖지만 반면에 기피하고 심지어는 혐오하기도 합니다. 게으르고 능력 없는, 인생의 패배자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일을 하려는 의지 없이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돈을 받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복지학교에서의 쪽방체험을 통해 제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게으르거나 일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쪽방 일일체험에서 주민간담회를 했었는데 주민분들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사업을 하시면서 유복한 생활을 하시다가 한 순간 부도가 나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셨다는 겁니다. 막노동을 해왔지만, 이제는 몸이 망가져서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쉽지만 다시 올라가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고도 했습니다. 단순히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불치병이라도 걸리게 되면 사정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다 써서 빈곤층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게으르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겨우 안전망 역할을 하는 기초생활보장제도도 갈수록 유명무실해지고 있으니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지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많이 오해들 하는 것이 수급자라고 하면 젊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받으려 한다는 편견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수급자는 일을 할 수 없는 독거노인,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제약조건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젊은 사람이 일을 안 하고 돈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만난 수급자 분들 역시 연로하시고 혼자 사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셨습니다. 때문에 그런 편견을 전제하고 제도 자체를 무익한 것인 양 주장하거나 그렇게 많은 돈을 주면 안 된다면서 금액을 더 줄여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쪽방 주거비가 제일 싸다고 하는데도 최저생계비가 책정하고 있는 주거비의 세 배를 내야 합니다. 식비나 다른 부분으로 책정된 금액을 주거비로 메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끼 식비는 계산해보면 1900원 정도로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계속 집에서 밥을 해먹으면 겨우 끼니를 해결할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비를 주거비로 사용할 수밖에 없어서 수급자 대부분이 어쩔 수 없이 한 끼는 굶고 한 끼는 무료배식을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려면 한두 달에 몇 번은 외식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밖에서 사먹으면 최소 3천원 보통 5,000원은 들게 됩니다. 그리고 피복신발비는 18,000원 정도로 책정되어 있는데 이 또한 말도 안 되는 금액입니다. 아무리 싼 것을 사도 티 한 장 사고 슬리퍼 하나 사고 나면 끝날 금액인 것입니다. 겨울을 나려면 파카나 코트도 필요한데 저 금액으로 과연 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정보통신사회니 지식기반사회니 하면서 사회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켓바스켓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휴대폰 없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되었는데 휴대폰이 필수품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변화된 생활수준에 맞게 최저생계비도 바꿔야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최저생계비 수준이 실계측년도였던 1999년과 2004년 4인 가구 기준으로 살펴 볼 때, 평균소득 대비 38.2%에서 31.9%로 하락하였고, 중위소득대비로는 44.0%에서 37.3%로 하락했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액수는 늘었지만 상대적인 금액은 형편없이 줄어든 것입니다. 이는 가계 지출이나 소비지출 어느 기준으로 비교해 봐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이 상태라면 앞으로 격차는 더 심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최저생계비는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하는데 재정의 한계를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재정은 장기적으로 늘려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경제가 발전해서 OECD 국가 10위 근처에 진입했다고 선진국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복지지출 수준은 OECD 국가 중 꼴지 근처에서 헤맨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복지예산의 확충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독재시절 정경유착으로 엄청난 돈을 번 대기업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하지 않을까요? 재정 부족은 핑계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지금 최저생계비의 현실화 문제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중앙생활보장위원회 회의에서 생산적인 토론을 통해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한 번 가져 봅니다. 위원님께서도 노력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007년 8월 20일
김 연 수 (학생, 참여연대 희망UP! 복지학교 참가자)
릴레이 편지 ④
정부의 양극화 해소 의지, 정녕 있는 것입니까?
이 태 수 (꿏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
반장식 기획예산처 차관님께
최저생계비를 결정하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위원이신 기획예산처 반장식차관님, 안녕하십니까? 이런 저런 위원회에서 얼굴을 뵙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지면을 통해 인사를 드리자니 좀 멋쩍기도 합니다. 일방적인 편지의 형식이라 한편으론 죄송하기도 하지만, 대면해서는 일목요연하게 충분히 심정을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라서 이런 표현방식이 제 입장에서는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풀고자 하는 것은 짐작하시겠지만 내년도 최저생계비 결정에 관한 것입니다. 한 나라의 빈곤층에게 있어서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보장체계이면서, 인류의 역사상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공공부조정책이 우리나라에서는 기초생활보장제도임은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는 일이지요.
기초생활보장제도 애초의 목적에 부응하지 못해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1999년 법으로 제정되어 40년이나 지속되어오던 부실한 생활보호제도를 종식시키고 공공부조 역사상 ‘코페루니쿠스적인 전환’에 해당된다고 제 스스로 명명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된 지도 만 7년이 되어갑니다. 처음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각종 반발에 부딪혀 난항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통과되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기본생활의 보장이 국민의 권리로 인정되고, 연령에 상관없이 소득이 부족한 이는 누구라도 수급권자가 되며, 수급권자 모두에게 현금으로 소득보장이 이루어지는 성숙한 공공부조가 자리잡게 되었다는 그때의 느낌이 새롭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냉정히 생각해 볼 때 과연 이 제도가 초기의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지 깊은 회의감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나라에서 어떤 이유로든 스스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생존 여부까지 고민해야 하는 절박한 상태에 빠져 있는 분들에게 과연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든든한 지지망이 되고 있는 지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굳이 3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제도의 사각지대, 수급권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질적인 빈곤층을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세 명이나 되는 자식을 안고 선망의 대상이던 남의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져야 하는 한 엄마의 절박함에, 네 살 배기 아가가 장롱 속에서 굶은 채 서서히 생명의 불꽃을 사그라뜨리고 있던 그 비극적 상황에, 월 50만원도 안되는 소득에 절어 귀하게 맞이한 베트남 신부를 때려 숨지게 하는 흉포함으로 돌변한 농촌아저씨의 단말마적인 삶에, 70평생을 조국건설에 모든 것을 던졌지만 달랑 두 평 남짓 남루한 공간에 쓸쓸히 갇혀 오갈이도 없는 가운데 생의 최후를 기다리고 있는 이 땅의 수십만 독거노인들의 억울한 인생에 도대체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준열히 묻지 않을 수 없답니다.
인간을 위한 제도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물론 심각한 얼굴로, “주어진 예산의 제약”으로 인해, 그리고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그나마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선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자괴감을 느껴가며 나름 진지하게 해법을 모색하려는 공공부조제도의 기획자이며 집행자인 중앙부처 공무원들의 고충과 고뇌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단 한 푼의 돈도 소중한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피와 땀이므로 부정수급자에게 돌아가서도 안 되며, 필요 이상의 지원으로 복지병을 유발시켜서도 안 된다는 사명감을 불태우고 있는 기획예산처 공복들의 고충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반차관님.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제도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은 결국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극한적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진정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제도, 바로 그러한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 제도는 존립 근거를 이미 상실한 제도임에 틀림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가 이런 절박한 빈곤층을 위해 쓸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이 정녕 부족한 국가라면 최소한 저의 주장은 너무 낭만적이고 목가적이며 과도한 꿈이라 차라리 치부해 버리고 조용히 입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연간 900조를 넘는 부가가치가 생산되고 있고, 세계 무역규모 10위를 앞 다투고 있으며, OECD 선진국 클럽에 가입한 지도 10년이나 넘은 나라에서 절박한 빈곤층을 위해 수천억, 아니 수백억의 재원을 더 투여할 수 없다는 말은 너무 구차하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한쪽에서는 주체할 수없는 부동산 및 금융자산으로 인해 외국으로, 신천지로 생을 즐기고 있고 단지 그러한 부모를 만났다는 행운만으로 평생 진흙땅을 밟지 않고 살아도 되는 귀한 아이들도 속출하는 마당에, 가장 빈곤한 이들에게 가장 긴급한 생활 상의 수요를 해결해 주기 위해 재원의 배분 몫을 조금 더 늘리는 것이 그렇게도 불가능할까요?
엄청난 양극화 시대 공공부조 대상자 수가 동결된 까닭은
이미 아동수당에, 노인연금에, 장애수당에, 각종 복지서비스에 줄줄이 혜택을 보편적으로 누릴 수 선진복지국가에서도 공공부조의 대상은 상대적 빈곤 개념에 의거하여 인구의 10퍼센트를 유지하고 있고 국내총생산의 1.5퍼센트 정도를 그들을 위한 예산으로 할애하고 있는 마당에, 우리나라와 같이 제대로 된 사회보장 체제도 아직 없는 나라에서 공공부조를 통해 지지해 주는 인구집단은 겨우 인구의 3퍼센트, 그들을 위해 쓰는 재원은 국내총생산의 0.6퍼센트라는 것은 분명 사회정의를 들먹일 것도 없이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인 휴머니즘의 측면에서 볼 때도 매우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2000년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된 이후에 이전의 생활보호제도 시절보다도 수급권자 수는 더 줄어 160만 명선에서 굳건히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것인가요? 그렇게도 정부 스스로 자탄해왔던 양극화 시대에도 적어도 수급권자 수에 있어서는 요지부동이었던 이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요?
이것이 혹시 기초생활보장제도 시대에서도 여전히 빈곤인구는 정부가 관성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예산이 허락하고 있는 수준”으로 수급자 수를 조정하기 위해 최저생계비 수준을 가급적 통제하고 억제한 결과는 아닌지요? 법적으로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에서 13인의 위원들이 모여 민주적인 토론과 표결절차를 거친 것으로 포장되어있지만, 대부분의 정부 위원회가 그렇듯이 이미 정부위원이 과반수에 육박하게 포진되어 일사분란하게 표결에 임하는 대형을 갖춘데다가 무늬는 공익 또는 가입자단체이지만 때론 전문성도 때론 제도에 대한 진지성도 없는 친정부 성향의 위원들을 안정 배치하여 끝내 비밀 표결에서 ‘묻지마’ 투표를 하는 인사들 덕분에 이러한 정부의 의도가 매년 교묘히 관철된 결과는 아닌지요? 따라서 보건사회연구원의 수많은 전문가와 조사자가 주기적으로 행한 최저생계비 계측 조사에 흘린 땀과 노고는 이러한 교묘한 정부의 시나리오에 전주곡 정도에 해당하고 위원회에서 열심히 설득하고 논리와 통계를 들이대는 빈곤층을 대변하는 시민사회단체나 양심적 학자들은 그 시나리오의 변죽 역할로 이미 설정되어 있는 그 시나리오의 결과는 아닌지요?
이제 양극화,빈곤의 문제는 예산처 자신의 문제
반차관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참여정부 임기말임에도 불구하고 양극화및민생대책위원회라는 대통령자문위원회가 지난 7월 새로이 설치되었습니다. 기획예산처는 단순히 예산의 합리적 조정과 평가만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비젼2030」을 만들만큼 사회정책을 위한 재정투여의 선봉 역할을 자임하였고 그 덕분에 이제 60명에 달하는 인력으로 구성된 양극화해소 집행기구인 양극화및민생대책본부까지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이젠 빈곤의 문제가 더 이상 주무부처라도 여겨지던 복지부의 문제가 아니고 기획예산처 자체의 책임과 본분에 속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내일 결행하게 될 2008년도 최저생계비 결의과정에서 기획예산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실 수는 정녕 없습니까? 자칭 타칭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기획예산처가 언제나 그랬듯이 예산상의 이유로 자르고 깎는 악역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빈곤문제에 대해 누구도 생각지 못한 과감하고 전향적인 정책을 들고 나와 예산의 숨은 구석을 찾아내어 이제 이 정도는 하자고, 아니 해야 된다고 타부처를 선도하여 빈곤정책의 선봉자 역할을 행할 수는 없는 것인가요?
반차관님, 저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의 회의에 직접 참여할 자격은 없지만 내일 전개될 회의에서 기획예산처의 반전된 모습을 생각하는 기대감을 접지는 않으렵니다. 국민 중에서 가장 빈곤한 이들도 핸드폰을 사용할 권리가 있기에 최저생계비 생활품목에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고, 그리고 내년도 정부가 채택한 물가상승예상율은 3%이지만, 지난 3년간 생활물가상승율인 4.03%를 적용하는 것이 맞다고, 또한 추가되는 1천 억 원의 소요예산은 기획예산처가 사실 이런 상황을 위해 예비하고 있었던 재원으로 충분히 충당된다고, 그리하여 이 땅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스스로 자신과 심지어 자식들까지도 모진 목숨을 더 이상 연명시키기가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는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말씀하시는 반차관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헛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1916년 아사히신문에 <<貧乏勿語(우리말로 가난이야기)>>를 연재하며 약 90년 전 당시 일본인들에게 가난의 문제에 대해 명쾌한 관점을 제공해주었던 가와카미 하지메는 이런 글귀를 남겼습니다.
“참으로 돈 있는 자에게 있어서는 오늘날의 세상만큼 편리한 곳은 없겠지만, 돈 없는 자에게는 오늘날의 세상만큼 불편하기 그지없는 곳은 없을 것이다.”
반차관님. 돈 있는 자와 하등 다를 이 없는 이 땅의 그 돈 없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그래도 좀 편리한 구석이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최저생계비 한번 제대로 책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말이 길어 여기까지 읽기에 귀한 시간은 많이 내주셨다면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됩니다.
그럼, 내일 반차관님에게 기대되는 모습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다시 한번 음미하며 예서 줄입니다.
2007년 8월 21일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
릴레이 편지 ⑤
최저생계비 계측, 상대적 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윤 홍 식 (전북대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위원님들께
여러 가지 사회적 재정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사회안전망의 최후의 보루를 지키기 위해 애쓰시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위원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최저생계비를 대폭 높여 어려운 생활에 고통 받는 주위의 이웃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야 위원님들이나 위원님들의 결정을 밖에서 지켜보는 저희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심전심으로 복지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예산상의 제약이나 우리사회의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을 생각해보면 최저생계비를 높이자는데 선뜻 동의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정기적으로 최저생계비 수준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에서 위원님들의 소신을 펼치기도 쉽지 않고, 무엇을 제외하고 무엇을 집어 넣어야하는지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모두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최저생계비를 둘러싼 이러한 지리한 논란을 언제까지 반복해야하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드실 것입니다.
낮아지는 최저생계비와 확대되는 불평등, 대안은 없나?
그러나 과거를 되돌아보면 위원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저생계비의 모습은 우리 국민들과 위원님들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러 가지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99년 처음 최저생계비를 계측했을 당시 도시근로자 평균소득 대비 최저생계비수준은 38.2%에서 2006년도 현재 31.1%로 18.6%(7.1%포인트)나 감소했습니다. 현재와 같은 추세가 지속되면 최저생계비가 명목적 수준으로 떨어질 날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확대되는 불평등ㆍ양극화와 소외된 이웃
수출, 내수와 관련된 거시지표들은 우리경제의 밝은 전망을 보여주고 있고 대선주자들은 앞 다투어 장밋빛 경제전망을 내오고 있는데 우리사회 많은 분들의 삶은 더욱 더 곤궁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확대되는 고용불안, 여전히 현기증 나는 집값 등은 성실히 생활해온 우리 이웃들에게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참여정부를 비롯해 역대정부에서 복지확대를 외치고 있지만 서민들이 정작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댈 곳은 기초생활보장제도 이외에는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낮아만 지는 최저생계비로 인해 기초생활보장 이외에는 기댈 곳 없는 우리 이웃들의 박탈감과 위기의식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무엇인가 결단을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엽적인 논의를 넘어 상대적 방식의 ‘수준균형방식’으로 전환을
“휴대폰을 최저생계비에 포함시키는 것이 국민정서에 부합 하는가” 등 본질을 왜곡하는 지엽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현재 최저생계비가 가구의 생계수단이 막막한 많은 이웃들의 생활을 적절히 보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는지 되 물어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으로 최저생계비를 높여 중산층과 빈곤층의 삶의 수준의 격차를 완화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상황에서 적어도 현재의 불평등이 확대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은 차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최저생계비 수준을 상대적 빈곤개념을 직접 적용해 중위소득의 50% 또는 40%수준에서 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중위소득 대비 50%, 40%가 자의적이고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어 만든 최저생계비를 현상 유지하는 방법을 택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99년 측정한 최저생계비 수준이 미덥지 못하고, 지난 2004년에 측정한 기준 조차 과학적이지 않다면 지금 마련하고 있는 최저생계비 수준을 도시근로자 평균소득에 고정시키는 ‘수준균형방식’을 취하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2007년 현재 전물량방식에 의해 측정된 4인가구의 최저생계비가 120만원이라면 이를 도시근로자 평균소득(또는 다른 기준이 되는 소득)의 몇 %인지를 정하고 그 비율로 최저생계비를 고정시키자는 것입니다.
왜 ‘수준균형방식’이어야하는가?
수준균형방식으로 최저생계비 계측을 대체했을 때 네 가지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우리사회의 실정에 근거해 만들어진 전물량방식의 최저생계비 논리에 근거함으로써 수준균형방식의 최저생계비가 비과학적이라는 논란을 피할 수 있습니다. 즉, 근거 없이 중위소득의 몇 %가 아니라 실제 생활비를 계산해 보니 어느 정도가 필요하고 이 수준을 도시근로자 평균소득에 대비해 보니 몇% 수준이라는 방식의 접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모든 사람들의 선호가 동일하다는 논리적 전제에 입각한 전물량방식에서 간과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선호가 실제 생활에서 반영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양과 종류의 밥과 반찬을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백 사람이 있으면 백 사람 모두가 백 가지 선호를 가지고 있는데 전물량방식으로는 이를 반영할 수 없고, 다양한 선호를 반영할 수 없는 제도야말로 가장 비효율적인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재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정책은 개인의 선호와 필요가 정확하게 반영된 제도이고 상대적 개념에 근거한 ‘수준균형방식’은 이러한 개별국민의 다양한 선호를 생활에서 반영해 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앞으로 최저생계비 계측과 설정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란과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마다 되풀이되는 불필요한 논란과 공방을 피하고 한국복지가 나아가야할 보다 더 큰 논의에 전문가들과 국민들의 힘을 모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위원님들의 일거리가 감소하는 것이 조금 염려(?)가 되지만 흔쾌히 동의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마지막이지만 가장 중요한 장점은 수준균형방식에 입각한 최저생계비가 우리 사회 전체의 소득수준에 연동됨으로써 불평등과 양극화 완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분들은 만약 경기가 급락해 우리 모두가 어려워지면 최저생계비가 전물량방식에 비해 더 낮아질 수 있다는 우려를 하십니다. 물론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이에 대한 현실적 가능성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가 직면한 현실을 빈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함께 책임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상대적 개념에 근거한 ‘수준균형방식’은 사회적 통합과 연대를 더욱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준균형방식은 모두를 위한, 소외되지 않는 복지국가를 향하는 첫 걸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올 사회가 지식기반사회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적자본의 확충이야말로 국가의 명훈을 건 중대한 정책과제라는데 이견의 여지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더욱이 지식기반사회가 요구하는 인적자본의 확대는 높은 수준에 인적자본에 근거한 생산과 함께 지식기반사회의 생산물을 소비할 높은 수준의 인적자본이 담보된 광범위한 소비층을 필요로 합니다. 즉, 인적자본 확충의 대상은 특정한 몇 몇 사람들의 문제가 아닌 전체 국민들의 과제이기 때문에 국가는 모든 국민들의 인적자본 확대를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적자본 확충의 대 전제가 불평등과 빈곤완화에 근거한 안정적 생활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수준균형방식에 입각한 최저생계비는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한 초석이 될 것임에 의심에 여지가 없습니다.
존경하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위원님! 많은 현실적 제한들 속에서 최저생계비를 극적으로 높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현재의 수준을 유지하는 차선의 대안을 선택해 주시기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빈자와 부자의 불평등이 확대되는 것을 용인할 요량이 아니시라면 최저생계비의 수준균형방식으로의 전환은 존경하는 위원님들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위원님들의 지금의 결정이 한국 공공부조의 큰 진전을 가져오는 역사적 결정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간절한 소망을 담아 기원합니다.
2007년 8월 22일
윤홍식 전북대 교수(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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