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기초생활보장 제도의 현주소

국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빈곤가구의 최저생계를 보장하겠다는 것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하 기초법)의 정신이므로, 형식논리로만 따지자면, 기초법의 수급권자로 선정되지 않은 사람은 국가로부터의 보호나 지원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수급권자는 일단 제도적 도움의 범주 안에 들어왔으니까 최저생계를 유지하는 데 하등 문제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이 과연 그러한가?

국가의 보호와 지원의 필요성을 측정하는 척도로서 적용되고 있는 수급자 선정기준은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첫째, 기준의 적용 과정에서, 마땅히 보호가 필요한 사람(가구)들이 탈락된다. 7개의 세부기준들을 적용하고 난 후에 나타나는 종합적인 선정 결과가 상식과 경험칙에 어긋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상식과 경험의 객관적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사람을 골라내는 기준이 타당성을 인정받으려면 그 결과를 놓고 '과거에 비해 무엇이 더 좋아졌는가'라는 시비는 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기초법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최저생계 보장'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들에 대한 대책이 없다면 새 제도의 취지는 무색해지고 만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기준이 엄격하고 까다롭기 때문에 생겨난다. 충분치 않은 가용 예산과 대상 인원을 먼저 정해 놓고 만든 기준이다 보니, 빈곤선 이하의 사람들을 모든 대상으로 한다는 원칙이 지켜질 수 없게 된 것이다.

둘째, 현재의 기준에 따라 수급권자로 선정될 수 있는 사람들이 제외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어떤 신청자가 7개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그의 조건을 기준에 맞게끔 조정하는 노력이 충분히 기울여지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예를 들면, 부양의무자의 존재 유무가 문제시될 때 그의 주민등록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는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술적인 시도가 관건이 된다. 현 제도하에서 이러한 노력은 신청자 본인이나 사회복지 전문요원의 몫이지만, 그 어느 쪽에 대해서도 만족스러운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여기에 덧붙여, 자활의 전망이 불투명한 조건부수급권자 제도가 '자활'을 강제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 궁극적으로 빈민들이 국가 보호 프로그램의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하도록 목표하는 제도가, 실제로는 주체와 계획 모두에서 목표에 대한 확신과 전망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한편으로 수급권자로 남아 있도록 유인을 제공하는 측면마저 있다. (예를 들어 주민들은 의료보호의 혜택에 대한 미련 때문에 수급권자에서 밀려나기를 두려워한다.) 사실 '자활'은 미래 삶에 대한 최소한의 의욕과 자발성을 전제로 성립되는 것인데, 현 제도의 수준은 이러한 의욕이 전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계보조비를 타기 위한 조건으로만 기능하고 있다는 데 문제점이 있다.

이렇게 볼 때, 기초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과제는 '객관적으로 억울한' 탈락자가 생기지 않도록, ①선정기준을 개선·상향 조정하는 것과 ②현행 제도하에서 수급권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 그리고 ③조건부수급권자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민 상담을 통해서 기초법의 불합리한 사례를 발굴하고 당사자가 구제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례를 수집해서 분석하고 그것을 근거로 기초법 개정운동을 벌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운동의 형태는 소송, 캠페인, 토론회 등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

기초법 개정 운동

기초법 개정 운동은 제정 과정과는 달리 몇몇 전문가들에게 의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현행 제도의 불합리성은 현장에서 발굴된 실제 사례들을 통해서 생생하게 드러날 것이고, 그것에 근거한 대안만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사례를 수집해서 한 군데로 모으는 네트워크의 가동이 무엇보다 필요한데, 일선의 기초법 상담 센터들이 그러한 역할을 해야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한 네트워크는 비단 사례를 수집하는 일 뿐 아니라, 각 센터들이 올바른 상담을 위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통일적인 행보를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필요하다. 이러한 네트워크와의 결합을 통해서, 기존의 수급권자 운동본부는 현장과의 연계를 긴밀히 하면서, 전문가의 역량을 동원해서 생생한 자료에 근거한 중앙 차원에서의 개정 운동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구상이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성과가 지지부진했던 것은, 역시 일선 현장에서의 움직임이 통일적이지 않았던 데 있는 것 같다. 지금이라도 현장에서의 상담 활동을 활성화하고 그것을 근간으로 한 전국적인 개정운동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수급권운동 네트워크

지역 차원의 상담 활동을 아무리 성실하게 하더라도 제도와 지침 자체가 편협하기 때문에 부딪치는 한계를 우리는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 그리하여 기초법 시행 1주년에 되는 이번 가을을 기점으로 전국실업극복운동연대 소속의 조직들과 그 외의 시민·종교 단체들이 기초법 상담 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전국적인 네트워크의 구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현재 개정 움직임이 일고 있는 의료보호 제도의 문제점도 기초법의 내용과 맞물려 있어서 통일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 네트워크의 역할과 기능은 우선, 현장의 불합리한 사례를 수집·분석함으로써 기초법의 제도 개선 요구안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시민사회의 요구로 의제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선 센터들의 상담 역량을 높일 수 있도록 질 높은 교육과 정보 제공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상담 및 자료 분석에 필요한 자료집과 각종 서식들을 통일적으로 제공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기초법이 보장하지 못하는 100가지 사례」를 모아서 중앙생활보장위원회와 국회에 제출할 수 있다. 또한 중앙과 지자체 차원의 기초법 예산 확보를 위한 시민공익로비단을 구성해서 지역구 의원과 지자체 시·군·구의회 의원을 상대로 기초법 급여예산, 자활지원예산, 기초보장기금 예산 등의 확보를 요구해볼 수도 있다.

이 네트워크의 위상과 사업영역은 기초법 개정 활동을 공동으로 진행하면서 결속력을 확인하고 현실성 있게 조정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9월 중에 기초법 관련 단체 활동가들의 간담회를 열 것을 제안한다.



다시 생각하는 조직화

우리 운동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여전히 큰 간극이 있다. 자나깨나 우리가 고민하는 바는 당사자가 주체가 되는 운동이다. 수급권자가 주체가 된다는 것은 기초법이 명시하고 있듯이, '생계 보호가 국가의 책임이고 그것을 받는 것은 수급권자의 권리'라는 점을 수급권자 자신이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권리'로 인식하는 주민은 거의 없다. 그들의 관심사는, '전에는 나라에서 얼마를 받았는데 지금은 얼마로 줄었다(혹은 그나마도 못 받게 되었다)' 는 차원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보호'와 '보장'의 차이는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공염불이다. 국가가 주는 자원은 한정돼 있고, 따라서 그것을 받는 사람은 제한돼 있으며, 복지 '혜택'을 누리기 위해 어려운 관문을 뚫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고, 결정권을 가진 사회복지 전문요원이나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활동가는 하늘 같은 존재이다. 현재 상태에서, 그들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제도를 만드는 관료와 전문가가 모든 것을 결정해서 나누어주면 그것을 감지덕지 '받아 먹는' 사람일 뿐, 그 제도가 어떤 근거에서, 어떻게 만들어졌고 문제점이나 개선의 여지는 없는지를 판단하지 못한다. 이런 한에서 기초법이 강조하는 '국가의 책임과 국민의 권리'는 딴 세상 이야기이다. 가난한 주민들이 주인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없이, 보충급여를 몇 푼 더 받게 해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앞에서 제안한 기초법 개정 운동은 우리 사회의 복지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 자체가 우리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비스를 받는 클라이언트(client)로 늘 남아 있고 선한 의지를 가진 사회운동가들이 그들을 위해 대신 사회제도를 고쳐주는 방식은 당사자 운동의 본령(本領)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급권자 상담은 그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찾아주는 역할 이상의 의미를 지닌 활동이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다. 운동이 다름 아닌, 사람과의 '관계 맺기'라고 할 때, 수급권자 상담은 자연스럽게 관계 맺기를 시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상담의 과정에서 그 주민의 형편과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상담은 단지 수급자가 되게 해주거나 급여의 액수를 높여주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다른 프로그램, 다른 서비스로 연결시켜 주는 기능이 필요하고, 그 주민과의 접촉은 여러 가지 사안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관계를 상담자 한 두 사람이 전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활동가들 사이에 적절한 역할이 나누어져서, 한 주민(혹은 가정)에 대해 종합적이고 지속적인 관계 맺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담 센터는 상담하는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기초법의 혜택을 받는 데 필요한 정보와 실무적 도움, 일자리, 공적 제도를 통해서 해결할 수 없는 각종 의료, 교육 등에 관한 긴급 서비스 등―을 찾아내서 직접 해결해주거나 혹은 외부의 유관 기관에 연결해주는 일종의 종합복지서비스 창구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 많은 일을 어떻게 일개 센터가 다 할 수 있겠는가'하는 걱정이 따를 것이다. 전국의 센터들이 당장 그 모든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향을 그렇게 설정하고 기초법 상담과 취업 알선을 주된 활동으로 삼으면서 현재 역량에 맞는 범위까지 역할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활동이 기능적인 쪽으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기초법 상담을 하는 곳이니까, '가'라는 사람의 수급권 관련 업무가 처리되었으면 '가'와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이라는 식의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가'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또 다른 차원의 '관계 맺기' 시도가 필요할지 모른다.

가난한 주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깨닫고 주인으로서의 위치를 회복하도록 하려면, 종래의 '강의식 교육'만으로는 안 된다. 과거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대부분의 '관계 맺기'가 십중팔구는, '한 쪽이 가르치고 다른 한쪽이 배우는' 일방적 소통으로 점철되었다는 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직가들은 그러한 일방적 소통을 통해서 '배우는 쪽'의 의식이 바뀌기를 기대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충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사람의 변화는, 일상 생활 속에서 활동가와 주민 개인 사이에 평등한 눈높이에서의 의사소통과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으로 체득한 교훈이다.

그런 점에서 수급권자 상담은 새로운 관계 맺기의 출발점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수급권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발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도움 이외의 영역에서 우리와의 만남을 기피하거나 경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그들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목적의식의 강박에서 벗어나 편안한 이웃 사람으로 다가간다면, 그들(그들 중의 일부)과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영역은 점차 넓어질 수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단 현물로 나타나는 이익만이 아니다. 평생 동안 언제나 '주변적' 존재였고 '대상'이었으며 누구로부터도 존중받아보지 못했던 이들에게, 자신에 대한 애정과 자존감(自尊感)과 권리의식은 돈 이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이들이 험난한 인생 역정에서 입었던 수많은 상처와 좌절감을 씻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 그래서 자기를 올바로 바라보고 이웃을 중히 여기고 그들과 함께 권리 찾기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바이다. 우리 운동의 일부 영역에서 이미 활용되기 시작하고 있는 각종 인성 개발 프로그램 등은 이를 위한 유용한 소재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실업문제에 대한 사회의 체감도가 떨어졌을 때, 실업운동은 수면 밑으로 잠복할 수밖에 없다. 잠복한다는 것은 활동을 소극적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실업의 해소라는 단기적 목표로부터, 실업을 낳는 보다 본원적인 문제에 대한 장기적 대응전략 쪽으로 우리의 힘을 이동시킨다는 뜻이다. 장기적인 대응전략이란 역시 사람을 모으고 사람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정부가 일단 저소득층 실업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기초법이라는 제도를 내놓았고 그 제도가 온전치 못한 이상,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한 운동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래서 기초법 개정은 우리의 실업운동이 당면한 중·단기적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고칠 수 있는 내용 가운데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 것도 있고 조건부수급권자 문제처럼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수급권자 당사자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밑으로부터 힘을 결집시켜 운동을 가속화하는 효과 뿐 아니라, 그들이 명실공히 권리를 가진 주체로 변화되게 하는 데도 중요하다.

신명호 / 한국도시연구소 부소장
2001/10/10 00:00 2001/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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