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다 사건 2000일, 그때 그 사람들
사회복지 기타 :
2002/05/17 19:58
에바다 정상화 운동 몸담은 두 사람의 고백
아무도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7년 전 겨울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에바다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시설비리 사건들과 큰 차별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2000일 동안 싸우게 될 줄도 몰랐고 2000일 동안 포기하지 않을 줄은 더욱 몰랐다. 그래서 에바다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희망의 반증이다.
시설에서 일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장애인들의 인권침해에 관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해왔다. 외면하거나 마음 아파하며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르다. 혼자만의 힘도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명이나 모금의 형태로, 때로는 평택시청 앞에서 밤을 세우며,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위에 올라가서 이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호소했다. 에바다를 포기하면 모든 시설비리 사건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여기며 질리도록 세상에 소리쳤다. 그래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문제는 해결되고 있다. 그 싸움의 과정은 또 다른 에바다가 발생했을 때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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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바다 투쟁 2000일 기념대회 및 문화제 포스터 |
7년 동안 에바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에바다 문제로 싸우던 특수교육과 학생들은 이제 특수교사가 되어 또 다른 장애학생들과 살아가고 있다. 당시 에바다의 학생들은 대학에 갔거나 사회에 나와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에바다를 다큐멘터리로 기록하던 감독은 이제 장애인의 이동권이란 또 다른 주제로 장애인들과 함께 하고 있다. 단지 에바다 때문에 2년 동안 휴학했던 대학생은 이제 졸업이 눈앞이다.
우리는 2000일을 맞아 그 때 그 사람들을 찾았다. 에바다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 처음부터 이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1995년에 대학에 입학한 두 사람은 각각의 위치에서 에바다를 잊지 않고 있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장애인권운동가와 특수교사로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 에바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장애대학생의 교육권문제를 비롯해 에바다, 장애인편의시설문제까지 장애인으로 장애인문제에 대해 늘 깨어 있는 김형수씨. 내가 에바다의 교사라면 아이들과 싸울 수 있었을까. 특수교사는 선택받은 일부 장애학생들의 교육만을 책임지는 게 아니지 않냐며 눈물짓던 미랑씨.
그들의 이야기는 에바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에 힘써온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와닿을 것이다.
"이젠 열려라 제발!!"
전국에바다대학생연대회의 2기 3기 의장 역임
현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 3 학기
장애인권운동가 김형수
"ephphatha!!" 예수가 청각장애아의 입을 열 때 "열려라!"라는 뜻으로 외쳤던 "에바다".
Then, looking up toward heaven, He sighed and said to him, "Ephphatha" that is, "Be opened".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려라"라는 뜻이라.(마가복음 7장 34절)
7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가 6000여 평의 땅을 기증하고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2000만원을 전국의 에바다 농아교회가 출현하여 설립되어 농아인을 위한 특수학교와 생활시설인 농아원 그리고 이용시설인 에바다복지관으로 구성된 평택 에바다복지회.
주위 미군부대의 자매결연과 해외의 후원을 받으며 모범적인 시설로 국가에서 인정, 당시 원장인 최실자에게 훈장까지 여러 차례 수여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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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리에서 에바다 정상화를 요구하며 농성중인 학생들(사진제공 : 전국에바다대학생연대회의) |
그러나 1996년 11월 27일, 일단의 농아원생들이 "더 이상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질 수는 없다"며 재단 측의 비리와 미군에 의한 성추행, 원생들의 의문사, 인권유린을 고발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하지만 농성 5년이 지난 지금도 장애인시설 문제가 집약돼 있다고 할 수 있는 에바다농아원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구 재단측은 에바다 현장에서 물러나지 않고 시설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이러한 저항은 급기야 지난 3월 에바다 권오일 교사에 대한 집단 구타와 농성 공동체 해아래집을 야밤에 집단 테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이후 에바다 복지회는 민주적인 인사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사회를 구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농아원 아이들을 방패삼아 점거하고 있는 구 재단측의 거센 반발에 여전히 출입금지 상태다. 그리고 이제 오는 5월 19일 농성 이천일을 맞는다.
"돌로 맞거든 솜으로 갚아라(영국 속담)"
내가 에바다 투쟁에 참여하게 된 것은 97년 겨울부터다. 보다 정확히 애기하자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때인 것으로 기억된다. .
그 날 아침 어머니께 문안 전화를 드리면서 이러이러한 일로 집회를 한다고 말씀 드렸더니 어머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책임질 수 있거든 해라" 그리고 뒤따르는 정말 무서운 한 마디.
"한 10년은 눈감고 해야 할거다" 그 전화를 하고 평택을 오고 간지 6년, 에바다는 장애인 시설비리 투쟁, 장애인 운동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에바다의 닫힌 철문은 열리지 않고 농아원 아이들은 여전히 인권을 소유하려는 구 재단측의 총알받이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에바다를 해결 하지 못하면 졸업하지 않겠다는 어줍잖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구속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도 다하지 못한 채 이제 한 발 물러선 대학원생이 되었다.
처음에 내가 에바다 투쟁에 참여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만류 했었다.
심지어 장애인 운동을 열심히 했던 한 선배는 " 질 싸움에 왜 나서느냐?"라고 만류했었다.
단일 사안으로는 가장 언론에 많이 알려지고 해외까지 알려진 에바다 투쟁이 6년을 이어온 지금도 이 생각에 변함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계와 사회복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말 하면, 이런 글을 읽으면 인상을 찡그리고 거부감을 가질 독자들이 있을 것임을 물론 알고 있다. 왜 다 싸잡아서 비난 하냐고 그래도 열심히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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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단비리에 희생된 농아원생들을 추모하는 위령제(사진제공 : 전국에바다대학생연대회의) |
그러나 단 한번도 시설에 수용된 적이 없는 인간 승리 장애 극복의 표상인 명문 사학 졸업생 장애 2급의 뇌성마비인 나는 절대로, 결단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장애인을 위해 장애인권 운동을 한다는 그들을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고 실천한다는 장애인 단체와 사회복지 단체를 난 용서하지 못한다.
그들은 충분히 에바다를 빨리 정상화하고 아이들을 온전히 교육시킬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에바다 사건을 방관하거나 오히려 농성하는 사람을 분란을 일으키는 인물로 양비론을 펴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설립자의 사적 소육권이 기득권이 아이들의 교육권 보다 더 앞선다고 생각한다면 법적 구속을 감행하는 감옥보다 더 비인간적인 수용시설을 인정하고-시설 생활에 있어 어떤 합리적인 준거도 제시하지 못하므로-일주일 내내 같은 음식 같은 옷을 입히는 것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과 나를 역설적으로 용서할 수 없다.
어느 때 어느 시설에서 나보다 훨씬 뛰어닌 나와 같은 뇌성마비 장애인들이 떠먹이기 좋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갈아 놓은 죽을 먹는 모습을 발견 했을 때 장애인도 인간이며 같이 더불어 살자는 그들을, 나를 어찌해야 하는가?
"천천히 가는 것을 두려워 말고 가다가 멈추게 될까를 두려워하라(중국속담)"
사람들은 흔히 에바다를 혁명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허풍이고 무용담일지 모른다 에바다 농성하는 교사들이 농아 아이들이, 함께하는 대학생들이 승리하지 못한다면 사랍들은 그 에바다를 쿠데타라고 하던지 불순분자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에바다 투쟁의 승리가 해결이 10년이 걸린들, 그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다면 그 승리를 확신한다면 무엇이 힘들까마는 이미 한발을 빼버린 나는 어머니께서 말씀한지 10년을 버티지 못하고 주변의 이목과 질시와 나 스스로의 절망 때문에 에바다 투쟁을 멈출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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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바다 정상화를 촉구하며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진제공 : 전국에바다대학생연대회의) |
하지만 나는 비록 변절하더라도 알고 있다.
후배들의 인권과 제자들의 교육권과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똥물과 폭력에 맞서 가며 끝까지 싸울 해아래집 아이들과 교사들 부모님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절대로 이 혁명의 햇살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지금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을 나의 후배들이 있음을
스스로 독립군임을 자처허며 에바다 해결에 발벗고 나서는 인권 운동가들이 있음을
아니, 그들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에바다의 2000일, 나의 2000일
특수교사 미랑
전국 특수교육과 학생회 연합이라는 단체의 의장이었던 나는 처음에는 조금의 우쭐함도 느꼈고 그만큼 부담도 가지며 에바다란 사건을 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에바다 시설의 청각장애 학생들이 농성하는 곳을 찾아가고 그곳의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이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고 얼마나 처절한지를 알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던 에바다! 그곳에서는 6억 7천여 만원의 국고 지원금 횡령과 근무하지 않고 봉급만 챙긴 13명의 친인척 유령 직원. 이들의 재단에게 장애인은 놀아도 먹여주는 도구였다.
주민등록증을 2중 발급하여 국고를 2중으로 횡령했으며 그 확인된 숫자가 무려 88명에 이르고 장애인 수첩도 2중으로 발급하였을 뿐 아니라 후원금, 후원품은 모두 빼돌려졌다.
어린 농아 학생들은 제본 공장에서 새벽 1시까지 강제 노역을 당하고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 또한 농아 어린이 70여명의 인신매매와 미군에 의한 성추행을 방치하는 등 이들의 만행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참다 못한 학생들이 직접 들고 일어섰고 선생님들의 양심선언이 이어졌다. 이는 청각장애학생들이 반란이자 시설 반란의 시작이었다.
그때 내가 본 그들의 반란은 처절했고 치열했지만 금방 해결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어린 마음에 답답하여 평택역 옥상에서 고공 시위를 하자는 위험한(?) 제안을 하기도 했었는데...
추운 겨울 평택역 광장 앞에 쳐진 텐트농성...
긴 겨울동안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점점 에바다와 멀어졌고 4학년이 되어 임용고사 준비를 하느라 아주 까맣게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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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 기습시위를 벌이고 있는 대학생들 |
생각해 보면, 2000일을 맞이하는 에바다 싸움의 주인공들이 해아래 집이란 곳에 둥지를 틀고 그 처절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크고 작은 장애인 시설들이 국고를 횡령하고 장애인들의 인권을 유린했다는 보도를 들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국가의 허술한 감독을 틈탔거나 공무원들과의 더러운 결탁이 배경에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그사이 나는 임용고사를 보고 교사가 되어 아이들 앞에 서게 되었다.
에바다 문제를 처음 접했을 때 즈음의 도발적인 성향은 줄고 위험한(?)발상도 희석되었지만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에서 겪어야할 미세한 차별들에 무릎꿇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하는 노력은 문득 문득 생각나는 그들의 얼굴 때문이 아닐까.
아이들 앞에서 당당하고 싶다던 권오일 선생님. 지금 우리의 싸움이 시설비리를 척결하는 시작이라며 밝게 웃으시던 선생님.
그들의 싸움이 2000일을 꿋꿋이 맞이할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그 웃음과 의지였으리라 믿는다.
에바다는 아직도 싸우고 있다.
재단 쪽에서 입과 귀를 막은 학생들이 그들을 향해 똥과 오줌을 쏟아 부어도 그들의 싸움은 계속 될 것이다. 그것은 에바다의 승리가 단지 에바다만의 승리가 아닌 열악한 시설에서 견디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것이며 나 역시 다시 한번 두 손 불끈 쥐고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투쟁이 승리하는 날을 기다리며 다시금 움츠러들었던 마음을 다잡아 본다.
2000일 동안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길을 걸었던 에바다와 나!
결국엔 한길에서 만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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