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장애인복지의 이념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간에 장애인복지를 둘러싸고 발생된 다양한 논리체계들이 축적되고 진화되어왔음을 전제하여야하나 불행히도 한국의 장애인계는 이에 관하여 이렇다할 토론마저 제대로 해 본적이 없었다. 마치 척박한 황야에 어느 정도의 파종이 있었는가를 논할 수는 있을지언정 거름을 주고 수확하는 방법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시기가 너무 이른 감이 있을 정도이다. 다만 일부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북미의 장애인관련 논리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한국의 장애인복지정책과 실무가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는데 기여한 것이 이제서야 평가의 대상이 되는 정도이다. 본고는 이념적 파종의 종류를 늘려본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장애인복지의 이념을 "장애인복지에 관하여 정책 및 실무 그리고 이론부분에 방향성과 변화를 주는 사유체계"로 폭넓게 정의하고, 서구와 한국사회에 구분 없이 적용시킬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여 단계별로 시설주의, 통합주의, 수요자주권주의, 시민권주의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한다.

2. 장애인복지이념의 진화과정

1) 시설주의

여기서 의미하는 시설주의란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그룹을 그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비장애인과 분리하여 수용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는 복지개념이 장애인에게 적용되어 국가가 개입하는 초기단계의 이념체계이다. 이 단계는 장애인을 "열등인자를 발현시키는 사회적 암초"로 인식하여 제거하거나 실험대상으로 사용하던 미개한 단계에서 한 단계 발전적으로 이전된 상태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장애인들이 산업활동에 장애가 되어 사회적 부담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그들을 열린사회 속에 공존시키는 것이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추론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주류를 이루는 비장애인에 의하여 비장애인위주로 설계된 사회적 메카니즘에 장애인들은 그대로 적응할 수도 없었다. 장애인들을 자연히 그들만을 위하여 특수하게 설계된 공간에 머물게 하는 것이 전체사회가 장애인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정책적인 처방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사회적으로 봉쇄와 분리(containment and segregation)의 원리가 적용되어 장애인들의 장기 수용시설이 확산되게 된다. 직업적으로 그들이 일할 수 있는 특수한 보호작업시설(sheltered workshop)이 설계되었으며 교육적으로는 특수학교를 설립하여 지원하게 된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이 설계한 일상생활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본인들 스스로 재활과정을 극복하여야만 시설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2) 통합주의

장애인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좀더 섬세하게 진화되면서 장애인들이 반드시 대규모 수용시설에서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의문은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가족과 친지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만 그 사회의 주류에 편입되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논의로 이어진다. 이러한 논의는 장애인들에게 봉쇄와 분리의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보상과 지원체계가 필요함을 강조하여 소득, 이동, 직업에 관하여 금전적인 지원망을 갖추어야 한다는 정책적 조치를 결과하기도 한다. 북유럽을 중심으로 장애인들도 생활주기에 따라 비장애인들이 누리는 모든 생활의 모멘트와 경험을 똑같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대규모 시설이 좀더 가정과 비슷한 소규모시설들로 전환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는 스웨덴의 뉴리에(Nirje)등이 미국의 대규모 시설주의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제기한 소위 정상화(normalisation) 개념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뉴리에가 미국과 캐나다에 뿌린 정상화개념의 씨앗은 미국을 토양으로 하여 좀더 미국적인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월펜스버거(Wolfensberger)가 다듬어낸 미국식 정상화와 탈시설화 개념이었다. 그는 아이디어를 북유럽과 유럽에서 얻어서 좀더 파격적인 방법으로 미국사회에 적용시킨다. 그는 장애인에 관한 대통령위원회의 위탁을 받아 편집한 보고서적인 성격이 강한 문헌들을 통하여 규모의 대소에 관계없이 시설들이 장애인들로 하여금 소위 "시설병"을 앓게 하므로 모두 폐쇄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된다. 즉, 시설에 장기간 수용되면 장애인들은 격리로 인한 사회학습의 부재, 의존성의 심화와 존귀성의 파괴, 장애인간 군집의 결과 부정적이고 가치박탈적인 인식과 역할의 공고화 등을 경험하여 결국 비정상적인 객체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 상륙한 정상화개념은 주로 월펜스버거식 주장이었다. 이러한 논의에서는 복지전문가들이 설정한 정상화를 위한 기준과 처방들이 중시되며 지역사회 내에서 그들의 역할 역시 매우 크게 인식되게 된다.

3) 소비자주권주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애인들은 전문가와 서비스 등에 관하여 새로운 목소리를 내게 된다. 이는 서구사회의 시민운동의 한 축을 형성하였던 소비자주권주의(consumerism)와 궤를 같이하는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장애인들이 연합하여 당사자들의 고유한 경험이 반영된 서비스를 요구하는 모습은 이제 세계적으로 익숙한 현상이 되었다. 영국의 반분리신체장애인연합(The Union of the Physically Impaired Against Segregation)이나 캐나다 전역의 모든 장애인들을 대표하는 단체인 캐나다장애인위원회(Council of Canadian with Disabilities) 등은 여성운동이나 소수인종단체들과 연합하여 장애인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장애인관련서비스를 그들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결의들을 점차 일반화시켜가고 있는 노정에서 발견되는 바우처(voucher)제도 등은 그 한 예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발견되는 중대한 변화는 장애인들이 그 동안 무심코 받아들였던 전문가들의 처방에 대하여 이제는 평가를 하고 선택적으로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재활과정의 한 원리였던 전문가에 의하여 유도된 자결권(guided self-determination)의 미시성을 초월하는 선택권을 확보하겠다는 의지의 일반화로 이해될 수 있다.

3. 평가 및 과제

1) 한국적 상황인식이 결여된 논리확산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실현되는 모습이 각국의 역사성에 따라 다양한 얼굴을 갖듯이 장애인에 관한 이념 역시 한국적인 문화·역사적 상황과 소원해서는 지속적인 하위적 실체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상기한 정상화와 탈시설화에 관한 논의는 바로 서구의 논리체계가 한국적인 문화적합성을 보유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한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원래 평등권을 바탕으로 하여 생애주기에 다른 기회의 고른 부여를 의미했던 스웨덴과 덴마크풍의 정상화개념이 북미에 맞도록 변화된 것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서는 관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북미의 논리체계(월펜스버거의 정상화개념)를 한국사회에 가감 없이 적용하려했던 무모함에 대하여는 많은 비판을 가하여도 지나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중앙정부의 복지예산부담 경감을 위해서 주정부로 장애인시설을 이관하기 위하여 시도된 계기, 탈시설을 추진하기에 앞서 갖추어진 지역사회와 장애인개인에 대한 지원체계의 수립, 민간복지재원 조달의 용이성 등에 현격한 차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탈시설화를 미국과 캐나다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한국의 현실을 외면하는 무모함에 가깝다. 단적인 예를 들면 30년 가까이 탈시설화를 추진한 미국의 경우 현재 전체장애인구의 약 6%가 그들에게 맞는 시설속에 수용되어 있는데 반하여 한국은 전체장애인구의 1%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도 보유하고있지 못한 실정이다. 시설들의 현대화정도를 비교하면 한국의 현실은 더더욱 비참한 형편이다. 시설들을 폐쇄하고 지역사회로 장애인들을 복귀시키려할 때 받아줄 지역사회에 어떠한 지원체계가 마련되어 있는가? 중증장애인들을 돌볼 수 있는 가족, 이웃 등에 대한 지원체계가 하나라도 되어 있는가? 또 중증장애인들 스스로가 이동하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재정보조를 하고 있는가? 편의시설은 되어있는가? 이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가정과 지역사회로 돌아온다는 것이 과연 진정한 통합인가 아니면 탁상전문가들과 이론가들이 설계한 사회적 덤핑(social dumping)인가? 월펜스버거의 개념정립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있는 서구의 존스(K. Jones), 세인스베리(S. Sainsbury), 올리버(M. Oliver) 등의 주장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순차적인 합리성을 이해한다면 한국은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 명확해진다.

2) 시민권개념의 공고화

앞에서 소비자주권주의를 논의하면서 장애인관련 이념체계의 변화를 감상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좀더 명료한 개념정립이 필요한 부분이다. 소비자주권은 신자유주의와 결합하면서 모호한 개념으로 거듭나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시민권(citizenship)을 적극적 시민(active citizen) 혹은 소비자주권(consumerism) 등으로 중화시키려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소비자의 최대역할은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다. 생산과 포장 그리고 진열은 생산자의 몫이다. 소비자는 단지 진열대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수요가 공급을 넘어설 때는 더더욱 선택권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장애인복지에 관한 논의를 함에 있어서도 단순한 선택권의 확보만으로는 장애인들이 그들의 고유한 욕구를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마샬(T. Marshall)이 1963년에 주장한 사회권적인 시민권으로 돌아가 보면 좀더 명확한 해답을 구할 수 있다. 그는 "시민은 그 사회의 형상을 창조하는 과정에 참여하여야 하며, 중요한 기능인 노동, 레져, 정치적 토론, 여행, 종교활동 등에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의 개념대로라면 시민권의 반대는 곧 사회적인 배제가 되는 것이다.

4. 맺는 말

한국의 장애인복지 이념은 이제 한국의 상황을 담고 지속적인 방향성을 제시하여야만 한다. 종착역만 있고 선로는 없는 기차여행은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다. 한국에 맞는 다음 단계는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이념체계를 갖고 순차적인 합리성을 구현시켜야 한다. 서구의 논리는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의 보조교재로 쓰일 수는 있을지언정 교과서로 삼을 수는 없다. 탈시설화가 그렇고, 정상화가 그러하며, 지원고용과 표준사업장 등 이념체계의 모든 하위개념들도 모두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시대상황을 반영하지 않으면 논리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보편성과 개별화를 동시에 확보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고유한 경험을 정책형성과정에 반영시킬 수 있는 절차적 틀을 갖추어야만 한다. 최근 한국사회에 거세게 일고 있는 장애인당사자주의도 단순한 선택권의 보장만으로는 그 의미를 절반정도밖에 찾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한정된 선택폭에 구속당하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비장애인이 비장애인을 위한 환경에서 설계한 장애인을 위한 복지프로그램이 장애인고유의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켜줄 것인가를 지속적으로 반문하면서 장애인당사자들을 기획단계에서부터 참여시켜야만 할 것이다. 그들을 분명 사회의 성원으로 인정한다면 소비자주권이라는 이념을 시민권이라는 좀더 근원적인 이념으로 환치시키고 그에 수반되는 하위 개념들을 정비해야만 한다.

이성규(공주대학교교수, 사회정책학)
2002/08/10 00:00 2002/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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