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된 정치문화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킨 2002 대통령선거가 우리 정치사의 분수령이 될 것임은 거의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명색이 여당인 후보가 조직과 자금에서 열세였던 것도 드문 일이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후보가 온갖 악재를 극복하고 극적으로 당선되었다. 그만큼 이번 선거에서 권력과 금력은 힘을 잃었다. 30년 넘게 우리 정치의 발목을 잡던 지역간 대립구도도 뚜렷이 완화되는 징조를 보였다. 대신 세대간 대결의 양상이 나타났지만, 그리 오래 갈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단골 변수였던 소위 북풍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선 직전에 터진 미국의 북한 화물선 나포사건, 북한의 핵동결 무효화 선언 등이 보수 신문들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했지만, 미선, 효순 두 여중생의 죽음 앞에 한 줌의 미풍으로 날아갔다. 아울러 미국의 영향력 또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뿐만 아니다. 작고 다양한 뉴미디어들이 거대 언론의 영향력을 잠재우면서 언론혁명의 징조를 보여주었고, 당내 경선을 통한 후보선출은 미흡하나마 정당민주화의 불씨를 살려냈다. 민주노동당의 부상으로 진보정당이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한 것 또한 획기적인 변화의 하나이다. 대중동원 유세가 TV 토론으로 대치되면서 정책선거의 양상을 보여준 것도 바람직한 변화이다.

이와 같이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변화들은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변화 자체가 우리의 정치문화가 낙후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 아니라, 나름대로의 한계도 적지 않다. 나아가 완성된 형태가 아닌 가능태의 성격에 불과하며, 이를 개화시키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도 이제 본격적인 민주정치의 길로 들어섰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20-30대를 위시한 시민들이 직접 정치혁명의 주연으로 등장했다는 점이 축복이다.

정책선거의 가능성

고무적인 일 중의 하나는 정책선거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대중유세를 압도한 TV 토론이 정책논쟁의 장이 되었고, 과거의 일방적 선전전 대신 다양한 단체들과 매체들이 주관하는 정책토론회가 연일 이어졌다. 지방선거와 재, 보궐선거 등을 거치면서 정당들이 공약을 개발하고 정비할 기회가 여러 차례 주어진 점도 도움이 되었고, 정치이슈의 퇴색이 상대적으로 정책이슈의 비중을 증대시킴으로써 정책선거의 분위기는 많이 고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공약집은 비대해졌지만, 이념적 일관성과 체계화는 그리 진전되지 않았다. 아직도 임기응변적이고 선심성 짙은 정책이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무책임하게 남발하는 정책들이 많았다. 수많은 정책들을 심층적으로 검증하기에는 시간도 짧았고, 토론의 공간도 부족하였다. 예상 밖으로 TV토론이 정책적 차이를 부각시키기 어려웠던 점도 한계이다. 어쨌든 정책선거의 활성화는 사회복지의 발전을 위해 크게 환영할 일이다.

복지확대에 이구동성

이번 선거에서도 사회복지정책은 핵심적인 이슈로 부각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난 97년 선거에 이어 사회복지는 주요 정책분야의 하나로 확실히 자리매김 하였으며, 유력 후보들 중 상대적으로 사회복지 확대에 보다 적극적인 후보가 당선된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실상 유력 후보들은 이구동성으로 사회복지의 양적 확대를 주장하였다. 이는 우리 나라의 복지가 낙후되었다는 판단에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이제 최소한 절대빈곤의 문제는 용납할 수 없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그 동안 사회복지의 오랜 질곡이었던 "선성장 후분배론"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제기되기 어려웠다. 이러한 긍정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양적 확대를 넘어 이념적 지향에 근거한 체계화는 미흡하였다.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강조한 민주노동당의 등장으로 진보-중도-보수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이루어지는 양상을 보이기는 하였지만, 이 또한 아직은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 복지영역이 선심의 영역에서 벗어나 핵심적인 선거쟁점으로 부각될 때 이러한 이념적 지향의 차이는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예산확충의 과제

각 당이 주장하는 사회복지의 양적 확대는 복지예산의 확충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물론 각 당은 복지예산의 확충에 모두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구체적인 수치는 달리 제시되었지만, 기준이 상이하기 때문에 평가는 쉽지 않다. 문제는 확충의 방법인데, 노동당의 경우 부유세 징수를 위시하여 탈루소득징세 확대와 금융소득종합과세, 군축과 주한미군감축 등으로 총 34조원의 초과세수를 마련한다는 화끈한 입장을 피력하였다. 이에 비해 한나라당은 탈루소득에 대한 과세 확대와 재정누수방지를 통한 재원확충을, 민주당은 이와 더불어 경제성장 7%의 과실과 사회간접자본 누수방지 등을 강조하였다. 각 당의 재원확보 전략은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상당한 공통점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군축을 강조한 노동당을 제외하면 사회복지의 확충을 위해 재정지출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정도까지의 구체적 계획은 보여주지 못하였다.

복지공약의 내용적 차별성

이념적 모호성과 사회복지의 양적 확대 공약에 묻혀 뚜렷하게 부각되기는 어려웠지만, 주요 정당들의 복지공약이 내용적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선유권자연대의 공약검증작업에서 나타난 결과를 중심으로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먼저 기초보장제도의 경우 전반적으로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 각 정당들이 공감하였다. 이에 따라 부양의무자기준 등 수급자 선정기준 완화를 통한 대상자 확대, 지역별ㆍ가구유형별 최저생계비 차등화, 차상위 빈곤층에 대한 교육ㆍ의료급여 등 부분급여 시행, 의료급여와 자활사업의 개선 등은 각 정당들에 공통적인 공약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최저생계비를 절대빈곤방식에서 상대빈곤 방식으로 전환하는 문제에 대해서 한나라당은 절대빈곤 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이유로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건강보험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이견이 노정되었다. 민주당은 재정통합 등 현제도를 유지, 보완하면서 보장성을 확대하자는 주장을 피력한 반면, 한나라당은 재정안정을 중시하면서, 지역과 직장간 재정통합을 유보하고, 민간보험을 활용하겠다는 등 보수적 입장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노동당은 조세방식으로 무상의료제도를 도입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개진하였다. 또한 민주당과 노동당은 모두 공공의료기관의 확대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소외된 노인들의 소득보장에 대해서는 목표보다는 방법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한나라당과 노동당은 모두 기초연금제 도입을 주장하였지만, 재원조달에 있어 전자는 보험료와 조세를 혼합한 방식, 후자는 조세방식을 주장하는 차이를 보였다. 반면 민주당은 경로연금 확대 등 기존방식의 개선을 주장하였다.

국민연금의 경우 한나라당은 장기재정 전망이 심각하다고 진단하고 급여축소 등의 대응책을 주장한 반면, 민주당은 장기전망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면서, 독립된 재정추계기구의 신설과 보험료 부과ㆍ징수업무의 국세청 이관이라는 시민단체의 주장에 동의하였다(한나라당은 유보입장). 그 외, 보육정책의 확충이나 공공임대주택 확대, 장애급여 확대 등에서도 각 정당들은 모두 적극적인 확대 입장을 보임으로써 외형적으로는 대동소이해 보였지만, 구체적 방법론이나 지향은 차이가 있었다.

이와 같은 차별성을 고려하여 대선유권자연대는 노동당, 민주당, 한나라당의 순으로 "개혁적", "다소 개혁적", "다소 보수적" 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 문제는 너무나 많은 과제가 존재하고, 양적 확대가 우선적인 과제가 됨으로써 복지정책을 뒷받침하는 일관된 이념적 지향이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나라 정당정치의 한계이기도 하다.

집권세력이 빠진 선거

특이한 현상 중의 하나는 DJ 정권에서 극심한 진통을 겪었던 의약분업이나 건강보험 재정통합 등의 정책이슈들이 특별한 쟁점으로 부각되지 못한 점이다. 그 이유는, 이 문제들을 현 정부의 가장 실패한 정책으로 공격한 한나라당도 주장하였듯이 정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준비 부족이나 행정력의 결핍 문제라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나아가 노무현 후보가 현정권의 실패를 책임질 집권당 후보라는 인식도 공감되기 어려웠던 사정에 연유할 것이다. 또한 사회복지 문제가 대선의 핵심 쟁점을 떠오르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번 선거는 실질적으로 집권세력이 빠진 선거의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따라서 현 정권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실종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미흡했던 복지운동

지난 2000년 총선연대의 활동으로 위력을 떨쳤던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번 선거에서 정책캠페인과 선거자금감시 운동에 주력하면서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단체들은 대선유권자연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여성단체와 환경단체들의 조직적인 노력도 돋보였다. 교수들은 20대 유권자들의 선거참여 독려에 나서기도 했다. 이들이 정치적 중립성을 표방한 것과 달리, 노사모와 개혁국민정당 등은 지지후보 당선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후자의 운동이 시민운동적 뿌리와 방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시민사회운동은 다양화의 계기와 함께 정체성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대선유권자연대에 합류한 참여연대나 경실련 등 기존 시민단체들 외에 크고 작은 시민사회단체들과 종교계, 장애인계의 활동이 폭넓게 전개되었고, 전통적인 사회복지단체들도 사회복지유권자연맹을 결성하여 참여하였다. 이에 따라 각종 정책토론회와 대중집회, 언론을 통한 정책검증 등의 활동들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과거에 비해 양적으로 확대된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금번 선거에서는 사회복지 이슈를 사회적으로 부각시켜 내는 인상적인 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앞으로의 발전 전망도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남겨진 과제들

이번 선거에서 제기된 사회복지 문제들은 결코 만만치 않다. 절대빈곤의 문제가 아직도 최우선 과제로 남아있고, 빈부격차의 심화와 급증하는 비정규직의 문제들이 주요 현안으로 확인되었다. 아울러 DJ 정부하에서 양적으로 확대된 사회보장 제도들을 정착시키고, 재정안정을 꾀하는 일들도 중요한 과제이다. 벌여놓은 복지개혁을 마무리하기 위해 행정적 인프라를 정비하고 이익집단의 요구를 조율하는 일도 중요하며, 사회복지의 양적 확대를 뒷받침할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렇게 과제들이 산적해있지만, 우리는 노무현 정부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의회 소수당에 기반을 두고 보수적인 다수당을 상대해야 하는 정치적 상황도 문제지만, 우리 사회가 아직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과 같은 민주노동당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념적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운동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선거 자체의 희비를 가른 국민적 참여가 복지사회를 향한 도정에 다시 한 번 충만할 수 있도록, 사회복지운동을 새롭게 가다듬고 힘차게 펼쳐야 할 때이다.
이영환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welcome@mail.skhu.ac.kr
2003/01/10 00:00 2003/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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