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잃어버린 여가를 되찾을 것인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노동은 "천한" 것이었다. 따라서 노동은 천민들이 하는 것이며 시민들은 여가를 즐기며 학문이나 예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은 중세 후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중세 말엽, 자본주의의 싹이 발달하기 시작하던 무렵에 칼뱅 등의 종교개혁을 계기로 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세례를 받았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 발달과 더불어 국가와 자본은 사람들을 산업 노동의 규율에 길들이기 위해 물리력과 법적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마침내 노동시장이 형성되고 사람들은 노동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국가는 헌법에 노동의 "권리"와 노동의 "의무"를 동시에 명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노동시장에 앞 다투어 나와서 자기 노동력을 팔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마침내 너무 많이 일한 탓에 목숨을 잃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이른바 "과로사"다. 일본에서 유명해졌지만 오늘날, 한국은 물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쉽게 관철되는 비극적 현실이다.

조선시대 농업 노동에서는 두레나 품앗이를 하면서 노동과 휴식과 놀이가 통일된 그런 생활문화를 가졌다. 그러다가 일제 하 산업화 과정 및 해방 이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산업 노동이 요구하는 규율에 사람들이 길들여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자본주의 산업 노동을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게 되었고 급기야 과로사로 옆의 동료가 쓰러지는데도 못 본 척하고 일을 계속 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과연 더불어 건강하게, 또한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삶의 문화는 어디로 갔는가? 어떻게 잃어버린 여가를 되찾을 것인가?

노동과의 동일시

우선 우리는 여가라는 개념을 단순한 휴식이나 놀이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 여가를 휴식이나 놀이로 보는 것은 노동을 위한 재충전으로 보거나 노동과정에 축적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과정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자체를 삶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노동을 위한 도구적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여가를 휴식이나 놀이라는 개념을 넘어 하나의 권리로서 보고자 한다. 일종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본권 개념으로 보자는 것이다. 마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동을 할 권리(?)가 당연시되듯 인간다운 삶을 위해 여가를 즐길 권리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한 극히 인간적 욕구 충족을 위해 노동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욕구 충족을 위한 삶의 과정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경우 노동은 그 자체가 자아실현으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는 노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성과나 지위를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그리하여 일자리를 잃는 경우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다고 판단, 자살까지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IMF 구제금융 초기인 1998년 초에 하루에만도 무려 30여명씩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바로 이런 "노동과의 동일시"를 역력히 증명한다.

일 중독에 빠진 현대인들

이렇게 되다 보니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욕구 충족이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오로지 높은 성과와 높은 평가를 받으려고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킨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언론에도 심심찮게 보도된다.

'30대 후반의 직장인입니다. 이상하게 저는 주말이나 휴일에도 일을 안하고 쉬는 것을 못 견딥니다. 불안한데다 컨디션도 평소보다 더 나빠지곤 합니다.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물론 일을 할 때도 몸의 상태가 좋다고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쉬는 날보다는 낫습니다'(서울 논현동의 한 회사원).

이 상황은 몸에 배인 노동 습관 때문에 편안한 휴식 자체가 일종의 고통으로 다가오는 상태다. 마치 마약 중독자가 마약 주입을 중단했을 때 느끼는 고통인 "금단현상"과 같은 것이다. 게다가 평소에 일을 하면서 신체에 피로와 통증을 느낌에도 그러한 느낌을 억지로 감추고 오직 업무와 성과가 주는 성취감에만 도취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사태는 생활세계에도 치명적 영향을 준다. 작가 엄인희씨는 이렇게 말한다: '… 남성들은 회사 다니면서, 회사 생활에 적응하면서 "회사가 내 목을 쥐고 있으니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래서 성을 회사의 스케줄에 따라 조절하지요. 이른바 회사형 인간이 되는 거예요. 회사가 "너 오늘은 성 관계 하지마" 이렇게 대놓고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따르는 순응적인 인간이 되는 거죠. 자기도 모르게 회사 일정에 성 스케줄을 맞추면서도 그게 자연스럽다고 느끼고 또 자기가 자유롭다고 느끼게 되는 거죠. 그게 제일 비극이죠.'

마침내 가족 등 인간관계마저 소원해진다. 일례로, 주부 박아무개(35)씨는 요즘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결혼생활 10년 동안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원만한 가정생활을 했다. 그런데 지난해 초부터 남편과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남편은 집에 들어와 "일찍 나가야 되니 건드리지 말라"고 신경질을 냅니다. 저도 남편 들어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죠.'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비롯된 일이다. 그때부터 남편은 '먹고 살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라. 언제 그만두라고 할지 모른다'며 주말에도 쉬지 않고 회사에 출근했다. 평일에도 밤 12시가 돼야 집에 들어오고, 아무런 감정 표현도 없이 침대에 쓰러지곤 했다. 아내인 박씨는 '사는 게 허무할 뿐'이라 말한다. 일에 매달린 남편의 생활이 부인한테 우울증을 유발한 것이다.

"시간주권"을 갖자

이렇게 파괴적인 사태를 극복하고 최소한 노동과 여가의 균형이라도 회복하는 인간다운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첫째, 나는 가장 먼저 사람들이 자기 삶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본다. 과연 자신의 삶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과연 자신의 소망과 현실이 얼마나 수렴하고 있는지 자기에게 조용히 물어보아야 한다. 그래서 원래 자신이 살고 싶은 모습을 추구하기 위해 당장이라도 정리하든지 아니면 몇 개년 계획이라도 세워서 차곡차곡 준비를 해야 한다.

둘째, 그런 가능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을 이루어내야 한다. 주5일제는 그 시작일 뿐이다. 무늬만 주5일제로 하고 실제 노동시간이 그대로 간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일주일에 실제로 주50시간 이상 노동을 하는 현실을 과감하게 바꾸어야 한다. 노동 이외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스스로 깨닫기 위해서라도 사회적인 노동시간 단축을 실질적으로 이루어내야 한다.

셋째, 노동시간 단축을 넘어 노동내용의 변화도 이루어내야 한다. 자신이 행하는 일이 과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건강하게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해로운 것인지를 냉철히 물어보고 해로운 것이라면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아니면 그것을 건강한 것으로 고쳐내는 운동을 해야 한다. 사실 떠나는 것보다 안에서 고치는 것이 훨씬 어렵다. 그러나 누가 하더라도 그런 변화는 이루어내야 더불어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넷째, 이렇게 확보된 여가 시간을 다시금 자본의 이윤 공간에 재포섭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하여 진정한 "시간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노동자의 시간주권이란 자신이 자기 삶의 시간을 그 어떤 강제나 압박이 없이 자율적으로 계획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시간의 길이나 노동시간의 배치, 노동 속도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노동 이외의 다른 시간을 얼마나 자율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여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고 또 그 내용을 자율적으로 채워나갈 수 있다면 이것은 바로 시간주권을 제대로 확보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중요한 한 전제조건이 충족되는 것이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대기업 회장이 은퇴하고 한적한 시골에 내려왔다. 그런데 그 곁에는 별로 볼품 없는 한 노인이 홀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잔잔한 강물과 호젓함으로 오랫만에 평온한 시간을 보내던 회장이 마침내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시오, 당신은 무얼 하던 사람이오?'

노인이 말했다. '그저 한갓 촌부일 따름이요.'

이 말을 들은 회장은 마치 자랑이나 하듯 지나온 자신의 삶을 유창하게 늘어놓았다.

'나는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서 세계적인 기업을 일궈 냈다오. 돈도 대단히 많이 벌었지요'

'그래서요?'

'난 돈을 많이 벌어서 은퇴 후에는 멋진 별장을 짓고 이런 시골에서 여유로이 지내는 것이 꿈이었소.'

이에 시골 노인이 말했다.

'그렇소, 난 오래 전부터 이렇게 종일토록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소이다.'

물론 이 이야기를 읽고 무릎을 탁 치는 우리가 모두 그 시골 노인처럼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어찌 보면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각양각색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은퇴한 대기업 회장은 돈의 패러다임 속에서 긴 위계 질서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난 뒤에 비로소 "삶의 패러다임"을 찾았다. 그나마 마지막에 패러다임을 바꾼 것은 다행이긴 하지만, 그 순간까지 그는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 더 높은 이에게 인정받기 위해, 권력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세계 최고의 명예를 얻기 위해 진정한 자기를 잊고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시골 노인은 처음부터 삶의 패러다임 속에서 살아왔기에 경쟁자를 물리치고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고 자기 능력을 과시해야만 하는 그런 "강박증" 자체를 모르고 살 수 있었다.

나는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청소년들이, 어린이들이, 아동들이,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처음부터" 삶의 패러다임 속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마치 제 각각의 얼굴과 재주를 가진 다람쥐들이 서로 격려하고 도와가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듯이. 또 마치 시골 노인이 들과 산에서 뛰놀며, 강가에서 가재도 잡고 논에서 우렁이나 미꾸라지도 잡으면서 커왔듯이. 그런 가운데 아이들은 과연 무엇이 정말 재미있는 일이고 과연 무엇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 차츰 배우고 깨닫게 될 것이다. 또 그럴 때 어른들은 아이들이 정말 배우고 싶은 것을 친절하고 소상하게 잘 가르쳐주면 된다.

아이들을 점수로 비교하면서 평가할 필요도 없다. 굳이 점수를 준다면 "절대평가" 개념으로 아이들 각자가 어떤 면에서 어떤 발달을 보여주는지, 무엇을 더 잘 하고 무엇을 더 흥미 있어 하는지, 이런 것들만 평가하면 된다. 굳이 아이들을 수직적인 서열로 세울 필요가 없다. 모두는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재주를 맘껏 뽐내고 더욱 향상시킬 수 있는 그런 터전을 마련해준다면 아이들은 자기 생계 해결은 물론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제 구조도 모든 아이들이 각자의 취향과 재주를 발휘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그렇게 가야지만 모두가 더불어 건강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한 인간이 태어나 20년 가까이 교육을 받아 인적 자원으로 육성되고 40년간의 직장 생활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드는 생산요소로 작동하다가 20년간의 노후를 보낸 뒤 삶을 마감하는 일종의 컨베이어 벨트와 같이 돌아간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그 누구도 "시간주권"을 올바로 행사할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삶의 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잠재력을 발휘하면서 자신의 앞가림은 물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사회경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사회구성원이 노동을 넘어 여가를 그 어떤 인권 못지 않게 하나의 권리로서 당당히 누리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강수돌 /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ksd@korea.ac.kr
2003/08/12 00:00 2003/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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